‘연기의 맛’으로 시작했다가 ‘셜록 홈즈’ 된 기분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오랜만에 MBC 드라마왕국
오랜만에, 드라마를 보며 영화 ‘인셉션’ 보듯 두뇌를 가동 중이다.
속도감이 크지 않음에도 지루할 틈이 없다. 별 대사 없이, 있어도 느릿한 말투에 어쩐지 천천히 걷는 것처럼 정적인 느낌을 주는 등장인물들의 움직임마저 고맙다. 생각할 시간을 벌 수 있으니 반길 수밖에. 지금까지 4회분이 방영된 MBC 드라마, 제목부터 끝내주는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연출 송연화, 극본 한아영, 제작 아센디오·우드사이드) 얘기다.
처음엔 한석규가 나와서 보았고. 막상 보니 역시나 배우 한석규(최고 프로파일러 장태수 역)의 푸른 빛 도는 연기를 볼 수 있어서 좋고, 신인인데 제법 눈길을 머물게 할 줄 아는 채원빈(장태수의 딸이자 연쇄살인 용의자 하빈 역)이 제대로 존재감을 드러내 좋고, 한예리와 노재원은 각각 장태수의 후배 프로파일러 이어진과 구대홍을 맡아 이성 대 감성, 뻣뻣한 원칙 대 유연한 융통성의 대립을 보이며 재미를 더하고.
오연수(장태수의 아내 윤지수 역)는 공백기 동안 연기 공부를 실하게 한 것인지 발성부터 달라져 돋보이고, 개성적 연기를 하던 윤경호(오정환 강력1팀장 역)는 성장이 엿보이는 전형적 연기로 안정감을 자랑하고, 이양희 이신기 김정진 한수아를 비롯한 크고 작은 역의 배우들도 제 몫을 알토란같이 해내고 있다.
해서 처음엔 줄거리? 없어도 괜찮겠는 걸~ 연기의 맛만으로도 배신 없이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이하 ‘이친자’) 충분히 보겠다! 했다. 그런데 웬걸, 이제는 ‘이친자’가 던지는 줄거리 떡밥을 척척 받아먹으면서도 누가 진실을 말하는 것이고, 누가 오해하거나 착각하는 것인지 혹은 누가 착시 및 오판 유발자인지에 혈안이 돼 있다.
처음엔 진실을 말하는 자를 찾으려 했고, 한석규에 대해 지니는 선입견 때문에 자꾸 장태수에게 경도되어 진실을 보는 눈이 흐려지는 것 같아 ‘적어도’ 착각의 늪에만 빠지지 말자 다짐하며 시청 중이다. 하빈이 말하듯, 우리는 보는 대로 믿는 게 아니라 믿는 대로 보는 어리석음을 지녔으므로, 가능한 있는 그대로 보려고 애쓰고 있다.
애쓸수록 결국 방아쇠는 당겨졌다. 영화 ‘인셉션’(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을 봤을 때 한 장면도 빠트림 없이, 작품 내 논리나 원칙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이해하고 싶은 열망이 들었던 것처럼. 누구의 말에도 흔들리지 말고 진실을 보겠다는 열망, ‘이친자’는 찔끔찔끔 조각들만 보여주고 그것도 시간의 순서를 뒤섞어 보여주지만 나는 그 일부 조각들로 유추해 그림 전체를 어서 파악해내고 싶다는 욕심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친자’에 제대로 낚인 것이다.
따라서 이젠, ‘이친자’가 하나의 현상이나 사항을 보여주거나 알려주면, 눈 앞에 펼쳐진 그 하나로 가능한 ‘숱한 실재적 가능성’을 빠르게 상상하고 추리한다. 착각이나 오해를 유발하고, 진실일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을 내포한 장면이 다시 등장하기 전까지 ‘나름의 결론’을 내리려 한다. 하나씩 밀리고 늦춰지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쌓일 것이므로, 단일한 결론을 낼 수 없으면 최소 두어 가지로 좁혀 놓으려 힘쓴다.
이러면서 드라마를 보니 ‘이친자’를 보고 나면 체력장 시험이라도 본 것처럼 기진맥진이다. 중요한 건 그리 하고도 손에 쥔 게 없다. 처음엔 저 뛰어난 프로파일러 장태수의 판단을 믿자, 장하빈은 피가 차가운 연쇄살인마다 했다가. 그렇게 보일 뿐 실제론 전혀 다른 목적의 행동일 가능성을 주욱 늘어놓아 보며 하빈에게 마음을 주었다가.
한때는 장하빈의 살인은 믿되 현재까지 발생한 모든 사건의 범인은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가. 그렇다면 장하빈 말고 사람을 죽인 또 다른 누구인가를 찾으며 가출 청소년을 폭행하는 최영민(김정진 분)에 혐의를 두어도 봤으나 아닌 것 같고. 땅 파는 윤지수를 보며 모전녀전 사이코패스 살인마인가 잠시 상상도 해봤으나 차라리 하빈 동생 하준(이수호 분)의 죽음처럼 딸의 악행을 덮으려는 엄마인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진정 장하빈이 연쇄살인 범인이라면 결단코 엄마를 위한 복수인 것인지, 애초 악마의 마음을 지닌 소시오패스인데 살인의 명분이 생긴 것뿐인지. 최영민 위층의 여자 김성희(최유화 분)는 진짜 집주인인지, 최영민과의 관계는 무엇이고 박준태 선생님(유의태 분)과의 관계는 또 무엇인지, 백골 사체의 주인공인 제자 이수현(이하민 분)에 대해 박준태가 숨기고 있는 이야기는 무엇인지 도통 알 길이 없다.
알 길이 없는데 그래서 답답한 ‘고구마’로 느껴지는 게 아니라 더욱 알고 싶은 흥미가 돋는다. 드라마에 ‘사이다’ 내놓으라고 짜증 내는 게 아니라 내가 얼른 사이다를 찾아내고 싶다. ‘이친자’의 뿌리칠 수 없는 매력이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상대의 마음을 바닥까지 읽는 능력으로 범인을 놓친 적 없는 프로파일러 장태수에게는 자신을 가장 무력한 아버지로 만들고 살인마라 해도 내 손으로 검거할 수 없는 딸이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이고. 유전적 프로파일러 능력을 역으로 뒤집어 증거 하나 남기지 않는 치밀한 범죄에 쓰는 것으로 보이는 장하빈에게는 범죄자 마음은 꿰뚫으면서도 딸의 마음은 살피지 않고 의심부터 하는 아버지이자 모든 이의 눈은 속여도 결코 속일 수 없는 단 한 사람 장태수 프로파일러가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일 터.
그리고 시청자에게도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가 있으니. 이토록 마음을 빼앗아 두 눈을 붙들었으면서도 제대로 된 ‘진실의 실마리’ 하나 쥐어주지 않고 여전히 머릿속을 헤집고 마음을 흔들어대기만 하는 드라마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가 바로 그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이다.
배신당하면서도 못 떠난다, 아니 매일 기다린다. 1회를 보고 하루 뒤 2회가 멀게만 느껴졌고, 2회까지 보고 난 후에는 3회까지 6일의 시간이 정말 미치도록 길었다. 4회까지 본 현재, 5회를 볼 수 있는 그날은 또 어떻게 기다려야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