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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 놓치고 이어도에 침 흘리는 중국의 속내


입력 2013.10.13 10:31 수정 2013.10.13 10:36        박경귀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kipeceo@gmail.com)

<박경귀의 중국 톺아보기>류큐왕국과 대한제국의 닮은꼴 패망사를 보니...

'중국의 습격' 강효백 저/휴먼앤북스 간
잊혀진 왕국 류큐(琉球)를 아는가? ‘오키나와’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류큐는 조선과도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유구국(琉球國)으로 불리던 독립해상왕국이었다. 12세기경에 200여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점점이 흩어진 류큐 제도의 최대 섬인 오키나와에서 류큐왕국이 탄생했다.

류큐왕국은 당시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중국과의 무역독점권을 획득하고, 중국과 일본, 조선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들과 활발한 중개무역을 통해 400여 년 간 융성했던 해상중개무역의 요충지였다.

류큐왕국은 임진왜란 당시 전쟁 군량미를 분담하라는 도요토미의 요구를 거부하였고, 전후 중국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알선 역할을 요구한 도쿠가와 막부에도 고분고분하지 않는 등 중국과 일본 모두에 일정한 거리를 두는 비무장-평화애호 정책으로 일관했다.

류큐의 독립왕국 지위가 흔들린 것은 도쿠가와 막부의 승인 하에 1609년에 이루어진 시마즈 다다스네의 침공이다. 이렇다 할 군대가 없었던 류큐는 싱겁게 굴복하고 이후, ‘중국을 아버지의 나라, 일본을 어머니의 나라’로 섬기는 이중종속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류큐왕국이 일본에 합병되어 멸망하는 과정은 조선이 국권을 상실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된 과정과 닮은꼴이어서 씁쓸하다. 30년의 시차가 있었을 뿐이다. 1875년 일본은 내무대신을 마쓰다 미츠유키를 류큐에 파견하여 ‘마쓰다 10개조항’을 반포하게 한다.

이 조치로 일본은 청나라의 책봉을 받는 것을 금하고 메이지의 연호를 따르도록 했다. 또 류큐의 상업을 일본 영사관의 관할 하에 두었다. 30년 후인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박하여 체결한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한 것과 유사하다.

1876년 류큐왕국의 상태왕이 향덕굉(向德宏), 임세공(林世功), 채대정(蔡戴程) 등 밀사 3인을 청나라에 보내 출병하여 류큐를 구해 달라고 청했으나, 이홍장은 외면했다. 조국을 구하려던 뜻을 못 이룬 임세공은 청나라에서 자결했다.

대한제국에서는 30년 후인 1907년 고종황제가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 3인의 밀사를 파견하여 일제의 침략행위를 막아줄 것을 호소하려다 실패하고 이준 열사가 순국한 것과 똑같은 안타까운 역사가 되풀이 되었다.

류큐왕국은 1879년은 일본에 병합되고, 대한제국 역시 31년 후인 1910년 한일합방으로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류류왕국은 청국과 일본의 이중속국의 애매한 위치에서 일본의 강압에 의한 병합으로 일본의 오키나와현으로 편입되었다. 류큐와 조선은 400년에서 600년의 유규한 역사를 자랑하던 독립왕국에서 하루아침에 일본의 무력 앞에 허무하게 무릎을 꿇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일본, 미국의 각축장 류큐제도

류큐왕국의 수난과 멸망의 역사는 지정학적 특수성 때문이다. 저자 강효백은 류큐 제도는 중국을 가두는 포위망이 될 수도 있고, 광대한 해양수역을 확보할 수 있는 영토의 기점이자 태평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출구가 된다고 본다. 이런 전략적 가치로 인해 류큐제도는 중국과 일본, 미국의 이해가 첨예하게 충돌하게 뜨거운 지점인 것이다.

저자 강효백은 해상독립왕국 류큐가 어떻게 멸망해 갔는지, 그 배경을 추적하고, 류큐를 둘러싸고 중국과 일본, 미국의 이해관계와 갈등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조명했다. 특히 그 과정에 숨어있는 청국 및 중화민국의 실책과 현대 중국 공산당의 해양팽창 전략을 해부하고 있다.

청나라가 류큐왕국을 잃어버린 것은 통치자들이 해양의식과 지정학적 사고 능력, 국제법적 식견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홍장(李鴻章, 1823~1901)은 태평양의 출구로서의 류큐의 전략적 가치를 몰랐다.

종주국과 속국관계는 국제법적 효력을 가질 수 없었다. 조선이 청국에 조공을 하면서도 자주독립국이었듯이 류큐 역시 형식상 청국의 책봉을 받고 조공을 바치는 관계이긴 했지만, 엄연한 독립국이었다. 당연히 국제법적으로 청국이나 일본으로부터 자주권을 갖고 있었다.

류큐를 독립국으로 유지함으로써 일본과 청국의 완충지대를 만들 수 있었던 기회는 두 번이나 더 있었다. 일본의 류큐 병탄에 놀란 미국이 전 대통령 그랜트를 청국에 보내 류큐 제도 전체를 3등분하여 일본, 류큐, 청국의 3분안(分案) 통치를 중재했지만, 이홍장의 ‘무대응 지연책’으로 국제법상으로 ‘묵시적 승인’의 결과를 낳았다.

또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막바지에 몰리던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중화민국 장세스 총통은 일본이 탈취 또는 점령하고 있던 영토와 도서의 원상 반환을 결정했다.

이 때 장제스는 만주, 대만, 펑후도의 반환과 한국의 독립을 포함하면서 류큐제도는 반환 및 독립의 대상으로 명시하지 못했다. 류큐제도 맨 남쪽에 있던 센카쿠(댜오위다오)의 영유권 분쟁의 씨앗이 여기서 싹텄다. 중국은 센카쿠가 대만의 부속도서로 당연히 전후 반환되었어야 할 고유영토라고 주장한다.

반면, 일본은 1879년 오키나와현으로 정식 편입된 이후 1972년 미국 관할 하에 있던 것을 되찾은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하며 팽팽히 맞선다. 국제사법재판소를 통해 분쟁을 해결하자고 일본이 큰소리치는 것도 법적 근거에서 밀리는 중국의 약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이어도 넘보는 중국의 해양패권주의

중국이 역사적으로 여러 계기가 있었음에도 류큐에 대한 영향력을 확실하게 유지하지 않다가, 90년대 들어서부터 센카쿠(댜오위다오)와 류큐제도에 대해 적극적 자세로 나오게 된 것은 해양 영토에 수반되는 해역의 전략적 가치를 재인식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육지와 대륙 중시 정책에서 해양중시 정책으로 전환시킨 사람은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이다.

덩샤오핑은 청조 말엽 대만과 류큐 제도를 일본에 할양해준 이홍장의 치명적 실책을 비판했다. 그는 1974년 북베트남의 서사(西沙, Pardcels)군도를 기습 점령하여 하이난다오(海南島)에 편입시켰다. 1988년에는 베트남의 남사(南沙, Spartlys)군도 9개 섬을 습격, 강탈하였다. 마오쩌둥이 티베트 점령에 이어 인도를 침공하며 서쪽 경략에 힘을 쏟았다면, 덩샤오핑은 해양영토 팽창의 전주곡을 울린 셈이다.

류큐왕국은 중국과 일본과는 다른 언어와 독특한 문화를 갖고 있는 독립왕국이었다. 2005년 국립 류큐대학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75%의 류큐인 응답자가 주민투표를 통한 류큐 독립을, 25%는 독립에 반대하나 자치의 확대를 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로도 류큐인들의 독립 요구의 목소리는 높아지고 있지만, 류큐왕국의 부활이나 류큐의 독립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

“류큐군도의 해역이 일본 전체 해양국토면적의 3분의 1에 해당”할 정도로 넓고 해역이 품고 있는 지하자원의 가치가 무궁하다. 결코 이를 놓칠 일본이 아니다. 문제는 중국이 2006년 후진타오의 해양대국 선언이후 센카쿠(댜오위다오) 영유권 분쟁을 넘어 류큐제도 전체를 노리는 장기적인 ‘류큐공정’에 나섰다는 점이다.

“류큐왕국은 원래 중국의 속국으로서 류큐군도 전부를 일본이 불법 점령한 것”이므로, “미국의 센카쿠를 포함한 오키나와 반환은 중국 영토에 대한 미일간의 불법적인 밀실 거래”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해상의 요충지 류큐제도를 놓고 중국과 일본의 격돌을 예고한 셈이다.

이제 중국도 국제법적 논거에 눈을 떴다. 중국은 1946년 맥아더 성명에서 일본 정부의 행정구역에 류큐를 명시하지 않았고, 류큐를 미국이 신탁통치했던 점을 들어 일본과 분리된 지역으로 볼 수 있다는 논거를 주장한다. 물론 일본에 속하는 부속도서에 명시되지 않았다 하여 그 자체로 중국의 영토라고 볼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떻든 중국의 대 일본 공세의 초점이 류큐제도 전체로 확대된 것은 틀림없다.

더구나 2010년부터 중국 해군에서 “중국-류큐 관계 연구 총서”를 발행하는 등 중국과 류큐 간의 역사 문화적 관계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는 영토의 편입이전에 역사 문화적 편입을 시도한 동북공정의 초기 단계를 닮았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저자는 센카쿠(댜오위다오)나 류큐제도의 영토분쟁이 중국과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동중국해에서의 해양주권의 분쟁은 중국의 해양대국화의 큰 추세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볼 때, 이어도 영유권 분쟁을 통해 한국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특히 이어도의 중국 기점인 서산다오는 중국의 해군기지가 있는 곳으로 이어도로부터 287km 떨어져 있어, 유사시 13시간에 출동이 가능한 반면, 부산 작전사령부는 이어도와 481km 떨어져 있어, 출동에 21시간이 소요된다. 따라서 174km거리에 있는 제주도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출동에 8시간이 소요되어 중국에 앞서 대응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중국이 항공모함 바랴크호를 취항하는 등 해양대국화하면서 서사군도 및 남사군도의 기습 점령과 같은 시나리오가 이어도에도 벌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중국이 남사군도를 기습 점령한 후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부두시설과 헬리콥터 착륙장, 보급기지 등 시설물을 확대하는 것도 중국의 해상 팽창주의의 일면이라는 점에 대해 경각심을 갖도록 촉구하고 있다.

저자가 발령하는 중국에 대한 해상 경계경보를 마냥 무시할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다. 2003년 우리나라가 이어도에 해양과학기지를 완공한 이후부터 중국이 분쟁지역화를 시도하고 있고, 2011년에는 중국 해양경비단정이 이어도에 출동하여 “허가 없이 중국 영해에서 인양작업을 하고 있다”며 중단을 요구한 것도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제주도 해역 역시 중국의 해양영유권 확대 전략의 가시권에 들어선 듯하다. 더구나 최근 일본이 집단자위권 행사를 추진하고 있고, 미국이 이를 지원하고 나서는 상황에서 바야흐로 한중일 해양 삼국지가 복잡하게 펼쳐질 듯하다. 한국은 해양영토 주권을 스스로 지켜 낼 만큼 해상전력과 역량을 갖추고 있는가? 우리의 해양인식과 해양정책, 해상군사전략 전반의 문제에 대한 거시적이고 종합적인 안목이 절실한 때이다.

글/박경귀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kipeceo@gmail.com)

박경귀 기자 (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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