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연의 우리 터, 우리 혼>땅 파 빙실 만들고, 왕실에 은어진상 안동석빙고
“낙동강에서 잡은 은어를 말리지 않고 빙실에 생물로 보관했다가 왕실로 진상했답니다. 현존하는 얼음 창고 중에서 국내서 가장 오래된 것이 안동석빙고입니다.“
지난 6월 초순 기자는 국내에 살아있는 석빙고 취재에 나섰다. 현존하는 석빙고는 현재 남한지역 특히 경상도에 6개와 북한 해주의 1개소까지 합해 7개소뿐이다
안동댐이 내려다보이는 빙실 앞, 안동민속향토사연구담당 이희승 학예사는 보물 305호로 지정된 석빙고 출입문을 따면서 최근에는 석빙고를 공개하지 않는다고 했다.
“예전에 잠시 빙실내부 공개를 했는데, 관람객들이 버린 오물로 인해 관리가 참 어렵더군요. 이제는 필요에 따라 공개를 한답니다.”
불빛 하나 없는 빙실은 무더위를 한순간에 날려버릴 만큼 서늘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석빙고는 겨울에 채집한 얼음을 늦은 가을까지 녹지 않게 보관하던 곳이다. 과학적 지식이 없으면, 불가능한 구조물이다. 기계적 장치 없이 섭씨 30도를 웃도는 여름날까지 무슨 수로 얼음덩어리를 보관했을까. 그 비밀은 무엇일까...?
석빙고의 유래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 지증왕 6년(505)에 국가에서 얼음을 저장하게 했으며 빙고전이란 관청을 두어 빙고를 관리하게 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있다.
우리 땅에 남아있는 석빙고는 경주, 안동, 영산, 창녕, 청도, 현풍 등지에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모두 18세기에 축조된 것이다. 나무를 건축 자재로 한 목빙고도 있었다고 구전되나 현재 그 흔적은 없다. 서울 용산의 서빙고동과 동빙고동은 중앙정부에서 직접 관리하던 대형 목빙고가 있었음을 알리는 동명이다. 하지만 그 목빙고는 소실됐다. 전란의 소용돌이와 무지의 결과다.
이희승 학예사가 전하는 안동석빙고의 역사는 오래전부터다. 안동석빙고의 원래 위치는 안동시 도산면 동부동 도산서원 아래 예안 땅에 있었다. 낙동강이 휘감아지는 북쪽 강가이다.
얼음을 떠 저장하기 좋은 입지적 조건에 해당되는 지형이다. 하지만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수몰을 피해 옮겨온 문화재들이 많았는데, 그중에 석빙고도 포함됐으며, 1976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게 됐다.
문헌에 전하는 예안지역 빙고에 대한 기록은 예안읍지인 ‘선성지’에 나타난다. 기록을 살펴보면 축조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예안현감으로 부임한 이매신이 조영했다. 이매신은 영조 13년(1737)예안현감으로 부임해 1740년까지 재임하였는데, 그가 부임한 3년 동안에 축조된 것으로 보여진다.
전해오는 이야기와 기록에 예안지방에는 석빙고가 만들어지기 전 이미 삼한시대 때 만든 빙고가 있었다고 한다. 이매신은 이 빙고에 돌을 정교하게 다듬어 보수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빙고가 있었다는 사실은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중기의 문신 김령이 쓴 일기 ’계암일록’에 나타나는 것을 볼 때 안동석빙고의 역사는 적어도 명종 1년(1546)까지 약 200년은 거슬러 올라간다.
명종 1년 11월의 기록을 보면 “안동의 일수(日守) 윤명동(尹沒)이 생은구어(生銀口魚)6마리를 감납(減納)한 일로 이미 3차례나 형신을 받았다하니, 여섯 마리의 물고기로 백성의 목숨과 바꿀 수 없다. 속히 놓아 보내도록 하유하라”고 왕이 경상감사에게 하교한 내용이 보인다. 여기서 ‘은구어’란 은어를 말하며 생은구어는 말리지 않는 은어를 말하는데, 이미 은어가 이 지역의 중요한 진상품이었음을 말해준다.
진상할 은어의 수량은 ‘예안읍지’에는 ‘7월 초 은구어 30마리를 올린다’고 했고,‘계암일록’에는“은어 100여 마리를 예안읍에서 안동부(安東府)에 진상했다”고 안동부를 통해 나라에 진상했음을 알 수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뜨거운 여름, 낙동강에서 잡은 은어를 말리지 않은 생물로 보관하고 또 진상할 수량이 채워질 때까지 보관하려면 냉장보관을 위한 빙고의 운영은 필수적이었다.
빙고의 운영은 매년 12월, 강에서 얼음을 떠냈다. 조선후기에 편찬된 ‘만기요람‘에 따르면 조선시대 한양에는 동빙고와 서빙고가 운영되었으며, 서빙고에만 약 13만 5000정의 얼음을 보관했다. 얼음 1정의 두께가 약 12cm, 둘레가 180cm 정도의 부피였으니 서빙고에 저장한 얼음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얼음을 떠내는 일은 고된 노동이었다. 엄동설한에 강가에서 얼음이 두껍게 얼기를 기다려야 했다. 동상을 입는 빙부들이 허다했고 심지어는 얼어 죽기도 했다. 때문에 겨울만 되면 한강변에 사는 백성들 중 벌빙부역을 피해 도망가는 이들도 많았다고 한다. 부역을 피해 남편이 도망가자 뜻하지 않게 생과부가 되었다는 ‘빙고청상’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안동석빙고는 구릉지에 자리 잡아 외부에서 보면 고분 같다. 특히 타 지역 석빙고와는 달리 출입구가 긴 쪽 방향에 나 있지 않고, 짧은 쪽에 입구를 낸 것이 특징이다. 비록 원래자리는 아니지만 다른 지역의 석빙고보다 관리보호도 잘 되고 있다.
얼음을 보관하던 빙실은 평지에 비해 온도변화가 비교적 적은 반 지하에 두었으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길게 축조했다. 길이는 12.5m, 폭이 5.9m의 장방형이다. 바닥은 남쪽으로 완만하게 경사지게 돌을 깔아 그 끝에 배수구를 내 빙실에서 발생한 물이 외부로 빠져 나게 했다.
천장을 떠받치는 홍예석은 양쪽 벽면에서 수직에 가깝게 약 2.6m를 쌓아 올린 다음 무지개 모양으로 휜 홍예를 틀어 올렸는데, 홍예는 4개로 올렸다. 홍예의 사이사이에는 자연석을 길게 다듬어 공간을 연결했다. 그 위에는 방수를 위해 잡석, 자갈 등을 깔고 강회를 섞은 진흙으로 쌓아올렸다.
안동석빙고의 봉토두께는 2m이며 상부에 잔디를 심어 열의 손실과 수해에 손상되지 않도록 조성했다. 봉토위에는 3개의 환기구를 설치해 그 위에 널판 돌을 얹어 빗물이나 직사광선을 차단했다. 빙실내부의 더운 공기를 이곳으로 배출시키는데, 이것이 선조들의 기발한 지혜다.
빙실에 얼음보관은 어떻게 했을까? 얼음을 저장할 때는 바닥이나 벽면에 단열성이 좋은 갈대, 솔가지, 짚, 왕겨 등을 사용했다. 얼음끼리 서로 붙지 않도록 왕겨나 솔잎 등을 1~2㎝ 정도 넣어야 얼음을 층층이 쌓아 오래도록 보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얼음이 전혀 녹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미미할 정도로 매우 느리고 서서히 축축해지는 정도로 녹는다. 찬 기운을 유지하는 데는 세 가지 비밀이 있다.
첫째는 절묘한 천장구조다. 1~2미터의 간격으로 4~5개의 홍예(무지개 형태)를 만들고 그 사이 사이에 움푹 들어간 공간에 내부의 더운 공기를 잠시 보관한다.
둘째는 내부의 공기를 빼내는 환기구멍이다. 굴뚝은 잠시도 쉬지 않고 더운 공기를 빼낸다. 그래서 석빙고 내부는 한 여름에도 0도 안팎을 유지한다.
셋째는 배수로다. 더디게나마 녹은 얼음은 물이 되어 바닥에 고인다. 바닥을 경사지게 해서 가운데와 가장자리에 얕은 수로를 만들었다. 한군데로 고인 물은 자연 증발된다. 그래도 단열의 문제가 미심쩍어 얼음과 벽, 천장의 틈 사이에 짚, 왕겨 등 단열재를 사용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석빙고의 성능은 과연 어떨까. 부지런한 학자가 실험을 했다. 빙고에 얼음을 50%로만 채우고 짚으로 단열을 하지 않으니, 3개월 후 얼음 량의 감소가 6,4%, 6개월후 에는 38,4%가 감소됐다. 반면 짚으로 단열을 하니 3개월 후 얼음양 감소는 00.045, 6개월 후 감소는 0.45에 불과했다. 조상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서울에서 관광 왔다는 한 가족은 기자가 빙고내부 사진취재를 하는 사이 잠시 들어왔다.
밖의 온도보다 20도 정도 내려간 서늘한 공간을 살피며 난생처음 보는 얼음 창고에 신기해했다. 빈틈없는 석빙고 내부구조에 감탄하며, 옛사람들의 여름나기 지혜가 존경스럽다고 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석빙고는 천연냉장고로서 왕실과 백성들의 건강을 지켜준 묵직한 유물이었다.
©(주) 데일리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