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녀' 장보리보다 '악녀' 연민정에 열광하는 당신은
<김헌식의 문화 꼬기>모두를 선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악녀의 문화심리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의 주인공은 왕건 역의 최수종이었지만, 정작 큰 인기를 끌었던 인물은 궁예 역의 김영철이었다. 연말 시상식에서 대상에 최수종의 이름이 거론되자, 일부 팬들은 반발하기도 했다. 2004년 최수종은 KBS 드라마 '해신'에서 불세출의 해상 영웅 장보고 역을 맡는다. 이 드라마에서 다시 악역과 다시 조우한다. 바로 염장이었다.
염장은 사서에 장보고의 목숨을 빼앗는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비록 염장이 최수종의 이미지를 해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염장 역의 송일국은 큰 인기를 얻었다. 송일국은 당시 상대적인 영웅 캐릭터를 보여주어 그 악당 캐릭터의 변화상을 각인시켰다. 본래 악인이 아니었지만 상황적인 환경 때문에 악인이 될 수밖에 없는 측면을 부각했던 것이다. 예컨대, 궁예는 원래 선하던 인물이 자기 스스로 악인이 되어가는 설정 속에 있던 것과 달랐다.
1999년 SBS '청춘의 덫'에서 열연했던 심은하도 점점 악녀로 변하는 캐릭터였다. 악녀로 변해가는 상황이 공감을 얻었기 때문에 심은하의 인기는 덩달아 폭등했다. 2002년 MBC '인어아가씨'의 은아리영은 어머니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아버지에 대한 처절하고 표독스런 복수극을 펼쳐 미움과 사랑을 동시에 받기에 이른다. 1972년 KBS 드라마 '여로'의 시어머니 박주아는 악녀였지만 그냥 악녀였고 지탄의 대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악녀 캐릭터는 대중적 유명인을 만드는 역할로 거듭났다. 아예 악역에 도전하는 배우들도 많아졌다. 2009년 MBC '선덕여왕'에서는 주인공이 선덕-덕만이었는데, 정작 최고의 배우라는 고현정은 미실이라는 악녀를 선택했다. 그 선택은 옳았다. 미실 신드롬이 일어날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때문에 주인공 덕만을 맡았던 이요원의 입지가 애매해졌다.
악녀나 악당 역을 맡은 주인공들이 화제가 되지만 미실 역의 고현정처럼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것은 드문 일이다. 즉 많이 회자가 되지만 큰 선망의 대상은 되지 못하고 만다. SBS '미스터큐'(1998)의 황주리(송윤아), MBC '이브의 모든 것'(2000)의 허영미(김소연), SBS '여인천하'(2001)의 경빈 박씨(도지원), SBS '천국의 계단'(2004)의 한유리(김태희), SBS '하늘이시여'(2005)의 김배득(박해미), SBS '아내의 유혹'(2009)의 신애리(김서형), MBC '불새' 윤미란(정혜영) 등이 이에 속한다.
하지만 이러한 악녀 역을 맡았던 이들은 대개 톱스타의 반열에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악역 연기 때문에 주목을 받았으므로 다음 작품 출연이 용이해졌기 때문이다. 시청률이 중요한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익숙한 얼굴은 시청자의 눈길을 한번 더 잡아둔다. 잘한 악역 연기 하나 열 선한 역할이 부럽지 않은 것이다.
주로 악녀만 살펴보았지만, 남자 악당 역할도 있다. KBS '제빵왕 김탁구'의 구마준(주원)이 이에 속한다. 주원은 '오작교 형제들'에서 막내아들 역할을 하더니 '각시탈', '굿닥터' 에서 는 주인공으로 활약해 크게 성공을 거두고, 최근 방영을 시작한 화제의 '내일은 칸타빌레'에서도 주인공 차유진 역을 맡았다.
악녀가 주목받는 것은 그들이 매우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본능을 억제하고 이상적인 모습만을 보여주고 밋밋하다면 악녀는 인간이 지닌 원초적인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예측할 수 없고, 변화무쌍하니 능동적이다못해 역동적이다.
주인공의 일상은 단조롭고 자신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지 않는 대신 평화롭다. 하지만 모든 사건과 에피소드가 악녀를 통해 발생하기 때문에 악녀는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연기적 역량이 매우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라도 악녀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 것이 호평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욕망의 수단이 비정상적이거나 합법적이지 못한 것이 문제다. 도덕과 윤리는 안중에 없다. 현실적인 모습인데 왜 이렇게 못된 인물로 그리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 스스로 욕망을 강하게 가진 존재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욕망을 가진 존재들은 기존체제나 질서에 도전하는 이들이다.
만약 기존 질서 안에 있는 이들이라면 새로운 욕망을 통해 저돌적으로 부딪히는 인물에 대해서 더욱 거부감을 갖게 마련이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모두 기존 질서 안에 있지는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언행의 설득력을 부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에 절대적인 악인이나 악녀는 이제 없어졌다.
악녀 정도는 용인해주어야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도 한몫한다. 이러한 점은 최근 인기를 모았던 MBC '왔다' 장보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결국 악녀는 파멸함으로써 도전에 실패하고 모든 일상은 평화를 찾는다. 갑작스러운 종말은 보는 이들에게 실망감을 낳을 수밖에 없다. 악녀가 연민정 정도라면 쉽게 끝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악녀는 인간은 스스로 다른 이들보다 선한 존재이고, 싶어 하거나 존재라고 생각하는 심리를 파고든다. 우리는 스스로 홀로 절대적으로 자신이 선하다고 할 수 없으니, 비교기준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한 비교 기준을 대신 제공해주는 것이 미디어 특히 텔레비전 드라마이다. 악녀는 인간이 구사할 수 있는 모든 악행을 응집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보는 이들이 선하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악녀를 통해 자신은 선하다는 인식은 일종의 죄를 씻어주거나 가볍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저 악녀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착한가. 아니 우리 주변사람들은 정말 착하다." 물론 드라마의 악녀는 가공의 인물이기 때문에 정말 그런 지 알 수가 없다. 작가가 해야 할 일은 정말 악독한 인물을 만들어서 이런 상대적인 안온감을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악녀를 내세웠는데, 일상의 우리 모습과 같다면 대단히 불쾌할 뿐이다.
현실에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은 악녀가 우리 모두를 선하게 만들어 줄 때 그 역을 맡은 배우에게는 플래시 사례가 쏟아지고 작품 활동의 길이 활짝 열린다. 상상하기 힘든 악행을 구현한 배우는 찬탄의 대상이 될만하다. 결국 그 캐릭터가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편, 악한 남자 보다 악한 여자가 많은 것은 이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드라마의 주시청자가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남성들이 주로 보는 정통 사극에서는 주로 악녀보다는 악남 즉 악당이나 악인이 많다. 악녀는 요부로 그려질 뿐이다. 또한 악녀가 많은 것은 그만큼 도덕적 윤리적인 금기가 여성들에게 더욱 강하게 압박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착함과 선함, 부드러움과 인내 그리고 수용과 헌신을 여성들에게 강조했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악녀들의 특징은 이와 반대의 지점에 존재한다. 따라서 지탄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민낯 그리고 속살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드라마'왔다, 장보리'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주인공은 장보리인데, 악역의 연민정이 더 화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착하게 인내하며 살라고 하는 덕목은 아름답지만, 그것이 주는 고통을 대중들은 싫어한다. 심정적으로 연민정을 옹호하지만 연민정의 욕망이 자신을 침해한다고 생각한다면 옆에 두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운명을 거부하는 연민정의 파멸을 내심 기대하지는 않을 때 장보리가 만약 못된 캐릭터라면 시청자들은 연민정의 성공을 바랄 것이다. 욕할 대상이 있어야 우리는 스스로 존귀해지니 말이다. 자신이 욕을 먹으면서 스스로 다른 이들을 존귀하개 만들어주는 공식적인 역할 수행자는 배우와 정치인 밖에 없다. 정치인은 다만 생명이 짧아질 뿐이고 배우는 길어진다.
글/김헌식 문화평론가·동아방송예술대학 교수
©(주) 데일리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