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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베이비 붐에다 영화속 로봇까지 아기, 왜?


입력 2015.03.13 09:07 수정 2015.03.13 09:13        김헌식 문화평론가

<김헌식의 문화 꼬기>'채피' 미약하고 결핌된 존재에서 '인간으로 성장'

땅딸 로봇 R2-D2, 키다리 로봇 C-3PO는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 6편에 출연하면서 주인공들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중요한 역할을 해내 그들을 결정적으로 구한다. 그들은 자기 느낌과 생각을 말하지만, 인간을 보조하고 그들을 위해 충심을 다한다. 이때까지만해도 그들의 움직임은 둔할 뿐이다.

당연히 뒤뚱거리는 모습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자연스러워지는데 그 움직임이 자연스러울수록 인간적인 면모도 더 부여된다. 아시모프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2004년 ‘아이, 로봇’(I, Robot)는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로봇이 등장하는데 이런 로봇 캐릭터는 리들리 스콧(Ridley Scott) 의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982)에서도 선을 보인 적이 있었다.

인간보다 인간적이라는 것은 외모보다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에서 나아가 정서와 감정을 가지고 사물과 대상을 파악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비인간적이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람들이 빠져있을 때 로봇은 그로 인해 고통받는 약자들을 대변해준다. 이러한 점은 '트랜스포머' 시리즈에서도 등장하기에 이른다. 비록 그들의 겉모습은 전투용 로봇들이지만, 인간보다 더 휴머니즘이나 인류애를 지니고 있다. 비인간적인 사회구조에서 핍박받는 일상의 삶을 구원하기 위한 움직임은 '지구를 지켜라' 같은 거대 화두로 연결된 셈이다.

애니메이션 ‘월-E’(Wall-E)의 중심 캐릭터도 대량 생산된 로봇에 불과하지만, 스스로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등장한다. 여기에다가 한 발 더 나아가 다른 로봇에게서 사랑을 느낀다. 이성 로봇에게 사랑을 느끼는 로봇은 연애를 이뤄간다. 특히 이영화에서는 언캐니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눈을 통한 감정의 표현과 커뮤니케이션을 극대화하고 있었다. 눈을 통한 감정의 교감이야말로 인간됨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기 때문이겠다.

그간 로봇의 한계는 인간처럼 자율적인 이성과 그것의 진화적 학습의 결핍에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뛰어넘는 인간과 같은 고안된 지능을 인공지능 즉 A.I 라고 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그것을 진화적 형태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학습이 필수적이겠다. 로봇의 학습은 주로 지식적인 차원의 업그레드였다. ‘터미네이터 2’에서 로봇 T-800(스카이넷 터미네이터)은 인간성을 존 코너에게 배운다. 물론 그러한 인간성은 자신을 희생하여 인간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이를 토대로 친구같은 로봇, 보호자 나아가 아빠같은 로봇의 이미지도 보여주기도 했다.

최근 이런 캐릭터는 한층 더 진화했다. 애니메이션 ‘빅히어로’(2014)에서 로봇은 친구나 보호자같은 역할에서 치료자, 의사와 같은 존재가 된다. 그러한 의료적인 역할은 정신과 마음을 모두 치유하는 것이다. 딱딱한 금속성 로봇이라기보다는 따뜻하고 포근한 로봇이었다. 캐릭터 자체가 푸근한 풍선의 이미지를 갖고 있어서 인간의 결핍과 부족함을 극복하는 것뿐만 아니라 언제나 정서적인 안정감을 유지해줄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이러한 캐릭터 역시 이미 인간이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모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 모듈의 원칙에 따라서 약간의 인식적 판단을 좀 더 인간적으로나 도덕 윤리적으로 수행할 뿐이다. 즉, 그들은 사람처럼 아기의 상태를 거치지 않고 바로 성인의 단계에서 활동의 지평을 넓힐 뿐이다.

이제야 영화 ‘채피’(2015)에서 로봇은 처음에 어린 아이와 같은 행태를 보인다. 채피의 설계자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이런 멋진 로봇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이렇게 말한 이유는 채피는 자신의 밧데리가 한정되어 있어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에 대해서 자신의 설계자인 디온 윌슨에게 따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아기가 어떤 사람으로 성장할지 알 수가 없다. 아이를 낳은 부모라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환경과 교육 그리고 노정에 노출시키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인공지능을 지닌 유아적 로봇로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로봇에 대한 교육화 과정은 영화적인 흥미를 자극하기에 충분하기도 하다.

그런데 애초에 디온 윌슨은 단지 음악을 작곡하고 그림을 그리는 로봇을 만들고 싶어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채피는 그런 기예적 수준을 벗어나 스스로 자아를 확장하면서 자신과 다른 이들이 공유하는 세계를 창조하기 시작했다. 아이와 같은 로봇이 창대한 능력의 소유자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휴머니즘을 강조했던 다른 캐릭터들과 다른 인간화된 로봇 채피의 특징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영화의 컨셉에서 무엇을 다시금 곱씹어야 할까. 진정한 인간됨이란 완연한 이성적 합리적 존재라기보다는 처음에 아기와 같은 존재였다가 점차 다양한 학습과 경험을 통해서 성장해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또한 휴머니즘과 도덕 윤리는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친구와 가족, 연인을 통해 스스로 터득해 가는 것이다. 인간은 미약하다. 그리고 결핍되어 있다. 자연의 동물보다도 못해보인다. 아기는 더욱 그러한 존재이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다움으로 문화는 물론 문명을 만들어 갈 수 있었던 것은 부족함을 넘어 그것을 극복한 상황을 누리고 싶은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꿈과 이상을 결핍 속에서 항상 가졌기 때문이다. 채피라는 캐릭터가 꿈꾼 것은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채피가 자신의 결핍을 인식하고 더 나은 목표를 위해 실천을 할 때 더욱 인간적인 면모를 갖게 될 것이다.

거꾸로 육체적인 완전체에 대한 소망만을 생각했다면, 더 이상 발전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중요한 것은 결핍이 아니라 그 결핍속에서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망하고 꿈꾸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다움이기 때문이겠다.

글/김헌식 문화평론가

김헌식 기자 (codess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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