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아리랑'이 보여준 절제의 미학
뮤지컬 무대로 옮긴 조정래 대하소설 '아리랑'
'애이불비' 정서로 그린 나라 잃은 민초들의 한
서로 사랑해온 수국과 득보는 일본군의 총에 맞아 죽은 뒤에야 서로의 품에 안긴다. 하지만 이들이 죽은 뒤 함께 부르는 '진달래와 사랑'은 슬프기보다 아름답다.
이어지는 2막의 피날레. 산 자와 죽은 자, 민초들과 일본군이 모두 뒤섞여 신명나는 '진도 아리랑' 무대를 꾸민다. 슬픈데 슬프지 않은 '애이불비'의 정서가 눈물 없이도 깊은 감동과 여운을 남긴다.
이처럼 뮤지컬 '아리랑'은 민족의 가장 아픈 순간을 파고들면서도 통곡과 분노를 절제하고 갈등과 슬픔, 편견을 '희망'으로 승화시킨다. 기뻐도 불렀고 슬퍼도 불렀던 노래, 생명이 탄생할 때도 한 줌의 재로 떠날 때도 불렀던 노래 '아리랑'이기에 가능한 장면이다.
무거운 주제를 가벼운 터치로 그려낼 줄 아는 이야기꾼 고선웅 연출이 1000만 독자를 사로잡은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을 뮤지컬로 옮겼다. 일제강점기 민초들의 삶과 사랑, 그리고 투쟁의 역사를 담아낸 12권의 긴 분량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 이후 감골댁 가족사 중심으로 재편했다.
양반 출신으로 편안한 삶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나선 송수익과 그를 흠모하는 옥비, 아버지가 의병에 의해 죽자 친일파로 변신하는 양치성, 감골댁의 딸 수국과 그를 사랑하는 득보의 이야기는 빠른 전개 속에 축약돼 펼쳐진다.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다. 삶이 무참히 짓밟히고 찢겨나간 채 일제 강압을 피해 만주로 떠나는 민초들의 모습이 지나치게 함축적이거나 빠르게 훑어지나가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하지만 일제 앞잡이 노릇을 하며 수국의 사랑까지 빼앗으려는 양치성과 의병대장 송수익의 대립과 갈등이 고조되는 2막 들어선 관객들의 기대에 부응한다. 다소 지루한 면이 없지 않았던 1막에 비해 2막은 관객들이 한눈을 팔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50여 곡에 달하는 음악들은 이 작품의 밝은 미래를 예감케 한다. 서양의 음악적 문법 위에 전통적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녹아 든 아름다운 선율이 가슴을 흔든다. 특히 1막 피날레를 장식하는 '어떻게든'은 비장함과 웅장함으로 관객들의 심장을 뜨겁게 한다. 물론 백미는 다양하게 변주되는 '아리랑'이다.
안재욱, 서범석(이상 송수익), 김우형, 카이(이상 양치성), 김성녀(감골댁), 윤공주, 임혜영(이상 수국), 이창희(득보) 등 배우들의 하모니도 인상적이다. 특히 무표정한 얼굴로 슬픔을 절제하며 부르는 '아리랑'이 주는 감동은 이들의 탄탄한 연기 내공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
특히 '옥비' 역을 맡은 국립창극단의 이소연은 이 작품이 발견한 최대 수확이다. 창극을 통해 오랜 기간 연기를 해온 소리꾼 이소연은 극이 절정에 오를 때마다 한 맺힌 목소리로 강한 흡입력을 발휘한다.
흙벽으로 발린 전통 서민가옥에서 모티브를 얻은 무대는 화려하고 다양한 무대 장치 대신 LED와 조명을 이용한 스펙터클한 장면 구성이 특징이다.
특히 '고스트'에서 활용됐던 무빙 LEC 스크린의 반투명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LED무대에서 주로 느낄 수 있었던 단절감을 없애고 보다 역동적 무대구현에 초점을 맞추기 위함이다. 30장면을 담아내야 하는 어려움도 이 같은 선택을 재촉했다.
하지만 사용된 영상들이 간혹 작품 전반에 흐르는 정서와 엇박자를 낸다는 관객들의 지적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한편, '아리랑'은 공연제작사 신시컴퍼니가 3년의 준비기간, 50억 원의 제작비를 투입해 만든 올해 최고 기대작 중 하나였다. 9월 5일까지 LG 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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