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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봉의 음기를 막기 위해? 덕주사 남근석의 비밀은...


입력 2015.10.25 10:39 수정 2015.10.25 10:39        최진연 문화유적전문기자

<최진연의 우리 터, 우리 혼 - 성석기행>언제 누가 세웠는지 미스터리

신령스러운 산봉우리, 우리나라에서 영봉으로 남겨진 산은 백두산과 월악산이다. 산 지형이 마치 누워있는 여성의 모습이다. 그 형태를 보고 싶다면 월악산 뒤쪽 수산리로 가보자. 휘영청 밝은 달과 어우러진 영봉은 영락없는 여성상이다.

월악산 음기는 무속에서도 이름났다. 하덕주사 앞뜰에 세운 3개의 남근석도 영봉의 기운을 막기 위해서다.

옛 사람들은 태양을 양(陽), 달을 음(陰으)로 불렀다. 즉 양은 남자, 음은 여자다. 풍수학에서 월악산은 음기가 왕성한 산이다. 음양의 균형을 위해 남근석을 세웠다. 그 후 세월이 지나면서 이 남근석들은 자식을 바라는 신앙의 대상으로 변천 됐다.

왼쪽 남근석은 부서져 있던것을 봉합했다ⓒ최진연 기자

3기의 남근석 중 1기는 높이가 1.4cm 정도이며, 2기는 높이 50cm 남짓한데, 그중 1기의 남근은 가운데가 부러진 것을 덕주사 정비할 새로 손질 했다. 이들 3기의 남근석은 자연석을 반 정도 다듬어 세웠으며, 남성의 성기보다는 선돌에 가깝다. 윗부분은 고의적으로 돌을 뜯어낸 흔적이 뚜렷하다.

특이한 것은 1기의 남근석은 둥근 불상연화좌대위에 얹혀 있는데, 이 남근석의 기둥은 팔각형으로 다듬질 돼 있다. 귀두부분은 남근보다 밖으로 돌출 돼있으며, 높이는 50cm 남짓하다.

덕주사에 3기의 남근석이 한곳에 조성된 것하며, 유별히 남근하나에만 연꽃무늬 받침대를 만든 것도 특이하다. 속세를 떠난 스님들만 수행하는 절간에 남근석이 왜 세워졌는지 미스터리다. 절이 창건되기 이전에 신앙숭배지를 조성했다면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나라 잃은 사연과도 연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적에게 쫓겨 다니면서 종족번식을 위한 신앙지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상상해볼 수 있다.

봉합하기 전의 남근석ⓒ최진연 기자

즉 덕주사가 위치 한곳은 첩첩산중이다. 산간오지에서 고달픈 삶을 살아야 했던 옛 사람들이 종족의 안위를 위해 선돌을 세워 수호신으로 모셨으며, 종족번식을 위한 토속신앙의 기도처로 이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월악산 송계계곡과 이어진 미륵대원지, 그리고 하늘재는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길이다. 2천여년 전 신라가 한강북쪽으로 진출할 때 이 고갯길이 개통됐으며, 8km의 긴 골짜기를 지나야 하는 험준한 교통로다.

월악산에는 송계계곡을 가운데 두고 산등성이를 따라 4겹으로 쌓은 석축산성이 있다. 이곳은 군사요충지로서 매우 중요한 지형이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조선을 거치면서 철벽산성이 길목을 지켜왔다. 산성의 둘레는 약 18km이며 월악산 능선과 그 지맥을 둘러 내성·중성·외성과 외곽에 또 다른 산성을 축조했다.

월악산은 천년사직의 한이 서린 신라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딸 덕주공주가 이곳에 머물며‘덕주사’란 절을 세웠다한다. 당시의 절은 월악산 정상아래 마애불 앞에 있었는데 6·25전쟁 때 소실되고 말았다.

연꽃무늬를 받침대로 사용한 덕주사 남근석ⓒ최진연 기자

암벽에 조성된 마애불상에는 동생과 누이의 나라 잃은 사연이 있다. 마의태자 일행이 금강산으로 가기 위해 하늘재에 들어섰을 때 고려의 호족들이 그들을 막아섰다. 신라 재건운동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결국 마의태자는 미륵사에, 덕주공주는 덕주사에 유폐 당했다. 이때 남매는 마애불을 세워 망국의 설움을 달랬다고 한다. 이 마애불은 미륵사지의 미륵불과 마주보고 서 있는데, 후세 사람들은 동생과 누이가 서로 마주보며 그리움을 달랬기 때문이라고 한다.

최진연 기자 (cnnpho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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