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조치 피해자에 “국가가 배상해야” 첫 항소심 판결
유신정권 시절 고초 겪은 13인에 12억 배상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하는 시위를 벌이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금됐던 피해자들에게 국가가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고등법원 민사20부(부장판사 양현주)는 14일, 유신정권 시절 인하대 재학생으로 유신헌법 철폐를 외쳤던 박모 씨 등 13명과 그 가족들이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국가가 이들에게 12억4296만 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고 노컷뉴스가 보도했다.
박 씨 등 2명은 1978년 11월 인하대에서 열린 학도호국단 서열식에서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하는 유인물 1000장을 만들어 배포했다가 긴급조치 9호를 위반한 혐의로 기소돼 징역 2년을 선고받을 후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또한 김모 씨 등 3명 역시 같은 인하대 생으로 1978년 9월 유신철폐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하고 시위를 선동하는 등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징역형을 살다가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김지하 양심선언문’ 사건의 주인공인 조모 씨 등 5명은 징역 1년~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고, 이 중 송모 씨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형기를 마칠 때까지 1년 넘게 구금되어있었다.
이들은 김지하 시인이 투옥 중 외부로 내보낸 양심선언문을 인쇄해 서울대와 이화여대 등에 뿌렸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졌었다.
서강대에 재학 중이던 안모 씨 등 2명은 1974년 3월 학내에서 유신헌법 및 긴급조치 철폐를 위한 시위를 주도했다가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기소된 후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이들이 이번에 항소심에서 국가의 배상 판결을 받아낸 것은 긴급조치 사건과 관련해 국가 배상책임이 구체적으로 명시된 첫 항소심 판결이라는 의미가 있다. 다만, 재판부가 대법원의 판례를 따라 긴급조치가 불법이 아니라는 것을 준용했다는 점은 아쉬움이 남는다.
항소심 재판부는 "형사소송법상 무죄 이유가 있었음에 관해 고도의 개연성이 있는 증명이 이뤄졌다고 볼 수 있으므로, 수사 과정상 위법행위는 유죄판결로 복역한 원고들의 손해와 인과관계가 있고 국가의 배상 책임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또 "원고들이 석방 후 끊임없는 감시 대상이 됐고, 그로 인해 군 생활에서 고초를 겪고 취업 등 경제활동에도 어려움을 겪었다"며 "가족과 친척들도 수사기관의 감시 등으로 인해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고 배상 이유를 설명했다.
이전 1심 재판부 역시 긴급조치의 위법성을 우회적으로 지적하는 등 긴급조치의 위헌성을 인식하면서도 긴급조치를 정당화한 대법원 판례를 따라야만 하는 하급심 법관들의 고충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도에 따르면, 한 변호사는 "대법원 판결에 저항하면서 문제점을 우회적으로 지적하는 것으로 보여진다"며 "이번 판결은 긴급조치 사건에 대한 국가의 배상 책임을 부인하는 판결들이 잇따르는 와중에 그나마 예외적인 구조를 통해 인정했다는 점에서 전향적인 판결"이라고 해석했다.
앞서 2014년 대법원은 긴급조치 9호 피해자 손해배상 사건에서 "긴급조치로 인한 복역은 국가기관의 불법행위가 아니며, 공무원의 위법행위로 유죄를 받았음이 입증돼야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할 수 있다"는 판결을 한 적 있다.
또한 2015년 3월에는 긴급조치가 위헌이며 무효라고 선언했던 2013년 판결을 스스로 뒤집고 "긴급조치 9호가 사후에 위헌·무효로 선언됐더라도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로서 정치적 책임을 질 뿐 법적의무를 지는 것은 아니다"고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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