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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은 노벨문학상 받는데 그럼 빅뱅은...


입력 2016.10.14 09:35 수정 2016.10.14 09:38        김헌식 문화평론가

보편성과 공감을 실천적 성과로 얻어야

저항과 인권을 노래로 풀어낸 밥 딜런이 2016년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사진은 밥 딜런의 앨범 재킷.
밥 딜런의 노벨상 수상은 충격과 반전이었다. 농담과 같은 일이 진담처럼 벌어졌다. 애초에 하루키가 강력한 후보였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가수를 최종 수상자로 생각하진 않았다. 도박사들은 체면을 구겼다. 노벨상 116년 사상 처음으로 가수가 노벨상을 수상했으니 말이다. 이는 빅데이터도 인공지능도 예측하지 못할 일이었다.

도박 사이트에서 애초에 예상 순위가 8위에 불과해 가디언은 오래된 농담에 불과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예측할 수 없었던 파격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고, 1주일 정도 발표가 늦춰진 것은 이에 대한 이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싱어송라이터를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농담아닌 진담의 현실이었다. 원초적이라고 할 수 있다면, 찬성할 수 있지만, 그 원초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비난이 가해질만했다.

여기에서 원초성은 본래 모든 문학은 노래에서 출발했다는 원초적인 기원을 말한다. 원초적인 관점에서 밥 딜런을 작사가에서 음유 시인으로 볼 수도 있었다. 분화된 문학 장르에서 융합의 지평으로 갈 가능성도 보인다. 그 융합은 본래적으로 하나에 있음을 다시금 보여준다는 점에서 오래된 미래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음유시인으로 불리긴 했지만, 밥 딜런은 포크송 가수로 명성을 얻어왔다. 저항 가수로 알려져 왔지만, 본인은 저항 가수라는 타이틀에 만족해 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1970년대 독재정권에서 많은 한국 가수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노래에 사랑타령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사유와 실천, 삶의 화두와 철학을 공유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물이라는 것을 일깨웠다. 비록 그 장르적 특징이 세련되고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그 안의 메시지는 항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기교나 외연이 아니라 안의 정신이 중요했다.

밥 딜런의 노벨상 수상에 대해 반발도 물론 있다. 가사가 어떻게 시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주장부터 제3세계 시문학에 대한 외면을 다시금 지적하기도 한다. 그동안 노벨상이 한국의 고은 시인은 2002년부터 14년동안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어 왔다. 우리 정부의 홍보가 오히려 심사위원들의 불쾌함을 사고 있다는 지적도 있고, 고은 시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말도 지적되어 왔다.

2012년 중국 소설가 모옌에게 돌아갔고, 상당 기간 아시아권에는 수상자가 없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동안 아시아 문학에 대해서 외면해왔지만 근래에 시혜 주듯이 배분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정작 시인에 대해서 인색하더니 통념으로 시문학으로 인정할 수 없는 싱어송 라이터에게 노벨상을 주었다. 새로운 영역을 열어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음에도 기존의 아시아 문학계는 섭섭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하나의 사례가 만들어져졌다는 점이다. 이제 싱어송라이터도 노벨상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의 모든 가수들이 단지 뮤지션에만 머물지 않고, 이런 노벨 문학상의 수상 가능성이 한층 더 가까워진 것이다. 물론 세계적으로 많은 공간과 영향력이 확보 되어야만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백인 중심의 뮤지션에 한정된다는 것이다. 흑인 뮤지션이 다음 번 주자로 대기하고 있는 지 모른다. 시간이 문제다.

그렇다면 한류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우리 음악계에서도 이런 점이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빅뱅과 같이 작사작곡이 가능한 뮤지션이 새계인들을 공감하게 하고 일정하게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활동을 지향해야 한다. 적어도 가수가 노벨상을 받는 꿈을 말하면 몽상이라고 지적하지는 않게 되었다.

하지만 아시아권 뮤지션을 다시금 노벨상 수상자로 지정할 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있을 수 있다. 시문학도 노벨상을 받기 힘든데, 그 가운데에서 가수가 그리고, 아시아라는 지역권을 생각하면 더욱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이상적인 지향점을 내포하고 있다. 현실에서 이뤄질 수 없기 때문에 그곳을 형상화하고 염원한다. 공감할 수 없는데 상을 달라고 할수도 없다. 형식적 요건은 언제나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애써 노벨상을 받을 필요가 있을까. 그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이자 판놀음인데 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노벨상이 단지 이론이나 가치만 가지고 평가를 하지 않는다. 그것이 얼마나 현실에 드러났는가가 중요하게 판단된다. 노벨 물리학상, 화학상, 경제학상 등은 그래서 수상자가 죽거나 나이가 많이 들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노벨상을 받으려면 오래 살아남아야 한다는 우스개 아닌 우스개가 있다. 세계질서에서 우리가 문화예술적으로 보편성과 공감을 실천적 성과로 얻는 작업에 케이 팝이 성찰점을 얻어야 할 것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글/김헌식 문화평론가

김헌식 기자 (codess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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