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이다. 영화 ‘안시성’ 개봉 당시, 양만춘 장군을 연기한 배우 조인성은 사물 역의 남주혁 칭찬에 입이 말랐다.
“잘해요, 열심이고요. 감성이 좋아요. 보시기에도 눈빛이 좀 남다르지 않나요? 이런 말이 어떨지 모르겠는데 ‘제2의 조인성’이랄까, 예전의 저를 보는 것 같아요, 이렇게 한 영화에 출연하게 된 게 우연이 아닌 것 같아요, 굉장히 잘될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후배 배우가 많을 텐데, ‘제2의 조인성’이라는 수식어를 달아 주니 남주혁의 행로에 등대 하나 비춰 주는 격이라고 하니 “아니요, 거꾸로일 수 있죠. 나중엔 그 비유가 제게 영광일 수 있죠”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주연 역할을 영화 안팎에서 제대로 하는구나 싶었는데 조인성의 눈이 정확했다. 그 뒤 남주혁은 안방극장과 스크린에서 단단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의 이준하는 아픔을 안으로 삭이고, ‘보건교사 안은영’의 한문 교사 홍인표는 진중하고, ‘스타트업’의 남도산은 공대생 특유의 뻣뻣함이 있다. 세 인물 모두 공통점이 있는데, 왠지 걸음이 느릴 것 같고 감정을 표출하는 데 능숙하지 않아 보인다. 한 시대 혹은 한 세대 전의 인물 같은 고전미가 있고, 날래고 약삭빠른 느낌은 전혀 없다. 사랑에 젬병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앞으로 달리기보다 뒷걸음치던 인물이 성큼 다가와 고백하면 이보다 설레는 일이 또 없다.
영화 ‘조제’(감독 김종관, 제작 볼미디어㈜, 배급 워너브러더스코리아㈜)의 이영석은 드라마 캐릭터들보다는 현실 감각이 있다. 남자 교수든 여자 교수든 코드를 맞춰 그들이 원하고 시키는 일을 할 줄도 알고, 학교 후배와 가볍게 즐길 줄도 안다. 그러던 영석이 휠체어와 함께 길에 나뒹굴고 있는 조제(한지민 분)를 일으켜 세워주면서부터, 자꾸만 조제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부터 삶이 달라진다. 그렇다고 사람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조제를 향한 영석의 사랑이 얼마나 순수하고 헌신적인지는 두말할 나위 없다.
모든 캐릭터는 배우가 지닌 색과 향, 느낌에 기댄다. 남주혁은 진득하다. 그래서 이준하의 외로움도, 다리를 절룩이며 걷거나 갓 쓰고 한문 가르치는 홍인표의 낯섦도, 서툴고 못났지만 순하고 착한 남도산의 자상함도, 착해서가 아니라 이 순간 너무 곁에 있어 주고 싶어서 머무는 이영석의 사랑에 너무나 잘 어울린다. 그래서 남주혁은 주변을 빙빙 돌다가 어느새 상대의 마음에 자신의 자리를 만드는 인물을 너무 두드러지지 않게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게 잘 표현한다.
남주혁 연기의 미덕은 자연스러움에 있다. 요즘에 흔히 보는 인물이 아닐지라도 세상 어느 구석엔 있을 것 같은 현실감을 부여한다. 남주혁의 자연스러움은 눈물에서 정점을 찍는다. 드라마 ‘스타트업’에서 서달미(배수지 분)에게 뭐가 그리 미안한지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만취해 아기처럼 엉엉 우는 장면, 눈물을 가리려 빨간 얼굴을 꽉 누르는 손가락을 보면 힘준 부분이 하얗다. 연기라고 할 수 없이 정말 우는 것만 같다. 영화 ‘조제’ 말미 수족관에 간 장면, 자신의 사랑보다 훨씬 큰 사랑을 전하는 조제의 말에 참을 수 없는 울음을 터뜨리는데, 분명 뒷모습만 보여주는데 남주혁의 뜨거운 눈물을 계속 본 것만 같다. 그래, 저런 순간에 영석이 운다면 딱 그렇게 울 것이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제2의 조인성’, 이런 수식어를 앞에 붙이자면 단지 키가 크고 선한 눈동자에 연기를 곧잘 하는 것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조인성은 멜로연기의 왕자다.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손바닥으로 쏟아지는 눈물을 훔치던, 그 붉은 입술이 온통 눈물에 콧물에 젖던 오열을 잊을 수 없다. 누가 죽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울었다. 영화 ‘안시성’으로는 남주혁이 멜로연기를 잘할지 가늠되지 않았다. 지금은 다르다. 남주혁의 멜로가 2020년 가을로부터 시작해 겨울 한파를 녹이고 있다.
제목에 ‘제2의 조인성’을 넘어섰다, 고 적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제2의’로 불리는 시절은 전도유망한 루키일 때다. 남주혁은 어느새 주연배우로 자리 잡았다. 두 번째 이유는 조인성과 결이 다른, 자신만의 멜로연기 스타일을 구축했다는 점이다. 뜨거웠던, 처절했던 조인성의 사랑과 달리 남주혁의 사랑은 미지근하지만 그래서 더 따뜻하다. 선배의 열기와 다른 후배의 온기 멜로, 느껴볼 만하다.
‘제2의 조인성’을 넘어섰다는 게 조인성을 넘어섰다는 의미는 아니다. 넘어설 이유도 없고, 각자의 색과 향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다만, 아직은 엔딩 크레딧에 남주혁의 이름이 두 번째다. 이미 무서운 속도의 상승이긴 하지만, 남주혁의 감성으로 오롯이 책임진 작품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