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승훈 판사 "피해자가 합의해줄 때까지 찾아가 2차 피해 호소 많아"
보복범죄 가중처벌·피해자 국선 제도 등 피해자 보호 장치 널리 적용되지 않아
법조계 "양형위 감경인자 결정으로 합의 절차 보완 필요…피해자·피고인 권리보장 고민 필요"
범죄 피해자와 가해자의 원만한 화해를 위해 도입된 형사 합의 절차가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가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법원의 지적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2단독 송승훈 부장판사는 지난 20일 특수협박 혐의로 기소된 A씨 공판에서 A씨 변호인이 피해자와 합의 기간으로 2개월을 달라고 요청하자 "합의시간을 길게 주는 것은 피해자에게 고통을 주는 시간"이라며 강하게 비판하고, 부적절한 합의 종용이 우려된다는 취지의 설명을 10여분간 지속했다.
송 판사는 "합의 기간을 길게 줬더니, 피고 측이 피해자를 14번 찾아가는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는 사례가 있었다"며 "재판부로서 수백 건의 합의 과정을 지켜보는데, 피해자가 합의해줄 때까지 찾아가 합의 종용·협박하는 등 2차 피해를 호소하는 피해자들의 탄원서가 많이 들어온다"고 지적했다.
송 판사는 이어 "재판부로서 합의 자체는 선의로운 과정이라서 최대한 협조해주려고 했다"면서도 "요즘 부적절한 문제가 발생해 긴 시간을 줄 수 없다. 1개월을 주겠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고지했음에도 피해자 의사에 반해 합의를 종용한다는 탄원서가 들어오면 피고에게 불리한 양형 요소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며 "합의를 위해 기일을 연기하는 것도 미리 불허한다"고 강조했다.
현재도 합의 종용 등 2차 가해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해자 측이 피해자에게 합의해 달라고 강요하거나 협박하면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제5조 9항의 보복범죄의 가중처벌 조항에 의해 처벌될 수 있다. 또 성폭력처벌특례법, 아동·청소년성보호에관한 법률에 따라, 성범죄·아동학대의 피해자는 자신이 아닌 선임된 국선변호인이 가해자 측과 합의 절차에 대응한다.
하지만 법조계는 피해자 보호 장치가 일반 사건에 널리 적용되지 않는 만큼 형사 사건의 원만한 해결과 피해자 피해회복을 위해서 합의 절차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승준 충북대 법학전문대학 교수는 "피해자가 합의에 나서지 않는 것은 가해자를 용서할 마음이 없고 엄한 처벌을 원한다는 의미"라며 "하지만 피해자와 합의는 가해자의 유죄 판결을 면해주거나 감경해주는 유리한 양형인자가 되기 때문에 피고 측에서 무리하게 합의를 시도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송 판사의 지적에 대해 "연애관계에서 '10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식은 이제 스토킹 범죄가 된다"며 "가해자를 만나는 것 자체로 힘들어하는 피해자에게 여러 번 합의를 시도하는 것을 종용으로 보겠다는 단호한 취지"로 해석했다.
천주현 형사전문변호사는 "최근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피해자와 합의를 특별감경인자로 보겠다고 밝혔다"며 "앞으로 피고 측이 유리한 형량을 받기 위해 더욱 안간힘을 써서 합의하려고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천 변호사는 "다만 피해자의 보호받을 권리와 피고인의 방어권 등 정당하게 재판받을 권리는 둘 다 중요한 만큼 이를 보장하기 위한 법원의 고민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피해자 측 합의 절차를 대리하는 피해자 국선변호사 제도를 일반 사건에도 확대해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촉구했다. 이어 "피고인 측도 고려해 피해자와 합의가 어려워 공탁을 선택할 경우 감경요인으로 적극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