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다가, 어떤 캐릭터를 음미하다가 문득 다른 영화의 인물이 떠오를 때가 있다. 창의력 없는 복제일 때는 그 배우를 넘어 영화 자체에 대한 김이 새버리기도 하지만, 비슷한 느낌이라는 것 자체로 소름이 돋으면서 배우와 작품에 대한 만족감이 배가 될 때가 있다. 특히나 연상된 인물이 무척이나 인상적 캐릭터였고 그를 빚은 배우가 연기의 대가인 경우라면 그 소름은 짜릿한 기쁨이 된다.
영화 ‘보이스’에서 김무열을 보며, 그가 세상에 내놓은 ‘곽 프로’라는 캐릭터를 보며 영화 ‘우상’을 통해 한석규가 탄생시킨 인물 ‘구명회’가 떠올랐다.
구명회는 현재는 도의원이지만 도지사를 노리는 인물이고, 도지사 정도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대통령을 꿈꾸는 정치적 야망이 대단한 사람이다. 인자한 미소를 만면에 띤 채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다 못해 도덕과 양심의 표상처럼 보였던 그가 자신의 앞길을 막는 장해물에 맞닥뜨리자 브레이크 없는 핏빛 질주를 시작한다. 굳이 내보일 필요 없었던 본색이 위기 속에 드러난 건지 상황이 그를 변질시킨 건지 헷갈릴 만큼 그는 냉정하고 똑똑한 것에 비례해 철저하게 잔혹한 면모를 보인다.
구명회가 타인의 피를 먹고 자란 괴물이 됐음은 천신만고를 겪은 구명회가 청중 앞에서 연설하는 장면에서 확인된다. 심지어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외계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소리로 얘기한다. 피를 토하듯 쏟아내지만 뜻을 알 길 없는데, 사실 무엇을 말하는가가 중요하지 않다. 구명회가 얘기한다는 게 중요한 것이고 청중은 다름 아닌 그가 우리 앞에 서 있다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내용보다 형식이 중요하고, 구명회는 그 존재 자체로서 대중의 우상이 되어 있다는 것을 확연히 드러낸다.
영화 ‘보이스’(감독 김선·김곡, 제작 ㈜수필름, 배급 CJ ENM)에서 곽 프로의 등장은 매우 강렬하다. 등판에 번호를 붙인 작업복 같은 옷을 입고 일하는 콜센터 직원들과 달리 그는 성공한 자본주의의 표상을 보여주듯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돈 냄새를 풍긴 채 사이비 교주보다 더한 신망을 받으며 일장 연설한다. 사실 그가 무엇을 말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보이스피싱으로 큰돈을 벌었고 성공 신화의 살아있는 증표다. 콜센터에서 일하는 이들은 누구나 곽 프로처럼 되고 싶고, 그가 기획한 대본으로 피싱을 당하는 피해자의 수가 늘어날수록 그를 향한 ‘리스펙’이 하늘만큼 커왔다.
나의 롤모델이 눈앞에서 떠든다는 것 자체, 그의 대본으로 일한다는 자체가 나의 성공을 한 뼘 더 내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 같아 가슴 벅찰 뿐인 상황이기에 그의 말 마디마디에 직원들은 환호하고 열광한다. “보이스피싱은 공감이에요”, 인간의 기쁨과 두려움의 포인트를 무섭도록 파고드는 비결을 드러낸 말을 직관적으로 내뱉는 곽 프로지만, 그래서 그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게 아니다. 제2의 곽 프로가 되고 싶은 이들에게는 그가 말하니 명언이다.
곽 프로는 구명회가 그러하듯 자신의 얘기를 듣는 이들에게 관심이 없다. 단지 그들을 통해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의 돈으로 표상되는 꿈과 희망, 인생을 약탈할 뿐이고 자신처럼 성공하고 싶어 하는 콜센터 직원들의 욕망을 먹고 자라는 괴물일 뿐이다. 과정이야 어떻든 자신의 계좌를 거액으로 채우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듣는 이의 마음을 이미 존재 자체로 사로잡고 있다는 측면에서, 내용보다 형식이 중요하다는 측면에서 곽 프로와 구명회는 그들의 우상이다. 누가 어떠한 피해를 보든 말든, 죽든 말든 내가 목표로 하는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한다는 측면에서 구명회와 곽 프로는 괴물이다.
아이러니하지만, 이 괴물이 그저 무섭기만 하거나 제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거저 우상이 됐다면 그 캐릭터도 영화도 싱겁다. 무서우면서도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어야 하고 아득바득 정점에 오른 것이어야 연민이든 공감이든 대리만족이 깃든다.
영화 ‘우상’은 구명회가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으나 결국 피를 묻히는 과정을 낱낱이 드러낸다. ‘보이스’는 곽 프로가 이미 우상이자 괴물이 된 뒤에 시작한다. 이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전사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그가 이미 우상이고 괴물임을 단번에 관객이 알게 할 숙제가 배우 김무열에게 주어졌다. 쉽지 않은 숙제를 김무열은 훌륭히 완료했고, 우리에게 숙제장을 제출했다.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
“곽 프로는 잘나가다 밑바닥을 쳤고, 거기서 기어 올라온 동물입니다. 양쪽의 그것, 잘나갔던 때와 밑바닥을 친 그 양쪽이 곽 프로를 지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잘나갔던 걸 잊지 못해서 콜센터에서 머리를 그렇게(기름을 발라 멋들어지게) 하고 있고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이고, 아이러니하게도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왔던 의식이 있어서 그것을 감추려 (명품족 행세의) 옷차림과 행동이 나오는 거죠. 이런 것들이 곽 프로 안에서 충동하다 보니까 이런 괴물이 나온 것 같습니다.”
사실, 강렬한 연기를 주연으로 하기는 쉽지 않다. 조연이면 칭찬받기 쉽지만, 주연일 경우 자칫 작품의 균형을 깰 수도 있고, 배우 자신도 마치 조연으로 2~3개 작품을 연달아 출연한 것처럼 대중에게 피로도를 주는 역효과를 나을 수 있다. 그런데 곽 프로 연기는 작품의 맛도 풍성하게 하고 배우 김무열도 돋보이게 한다. 지금과 같은 좋은 결과를 예상하고 자신 있게 연기한 것인지 궁금했다.
“항상 작업을 하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결과에 대한 평가를 최대한 배제하고 임하려고 노력하기도 하고 하다 보면 그런 걸 잊게 됩니다. 제가 맡은 캐릭터나 안에 들어가… 있는 드라마를 어떻게 하면 풍성하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입체적으로 만들 수 있을까만 생각합니다. 독특한 저만의 방식으로 만들고 연기해야 하는 동시에 감독님과 작가님이 생각하신 캐릭터를 온전히 구현해 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연기에 임합니다.”
“매번 작품마다 최선을 다해서 몸과 마음을 다 집어넣는데, 배우라는 직업이 가진 숙명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 관객분께 작품을 드려야 하는, 제 손을 떠나 온전히 관객분의 것으로 돌려드리는 순간이 온다는 것인데요. 그래서 이 작품이 어떤 작품으로 관객에게 다가왔으면 좋겠느냐는 질문이 항상 제일 어렵습니다. 어떤 캐릭터로 한계를 지어서 제가 말씀드리면 조금이라도 관객분의 관람에 방해될 것 같고, 저도 제한될 것 같은 느낌도 있어서 그렇습니다. 도리어 그런 것 없이 관객분이 영화를 만났을 때 제가 생각하지도 못한 해석을 내놓으시고, 제가 못 본 걸 발견하시고 그런 것들이 제가 하고 있는 일의 묘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배우가 이런 답을 내놓을 때, 질문을 부정하고 한 방 먹이는 답을 내놓을 때 쾌감을 느낀다. 지금과 같은 좋은 결과, 작품에도 도움이 되고 배우에게도 관객에게도 덕이 될 것을 예상하고 이런 연기를 했는지 물었는데 무엇을 예상하고 연기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예상치 못한 해석을 관객이 돌려줄 때 배우라는 직업의 묘미를 느낀다는 답을 들으며 배우의 세계에 대해 몰랐던 하나를 알게 되는 기쁨을 얻기 때문이다.
더불어, 어떠한 콘텐츠의 의미가 만드는 사람에 의해 모든 게 결정된다는 ‘텍스트 결정론’이 아니라 이를 보는 관객에 의해 새로운 의미가 생산된다는 ‘수용자 결정론’을 지니고 배우 인생을 걸어가는 이들을 볼 때 고마움이 인다. 쉬울 것 같지만, 나를 내보이는 일을 직업으로 하면서 내 연기보다 작품, 작품보다 관객을 우선 생각하는 철학을 놓치지 않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연기 철학을 가진 이들이 결국 관객인 우리에게 좋은 작품과 맛깔 나는 캐릭터를 배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