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설과 고성만 난무한 마지막 광주행…과거의 위세·명예는 어디로
군부독재 과오 끝내 반성과 사죄 없어…공로 재평가 여지도 없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광주에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기 전날, 광주 상무지구에는 차가운 비가 내렸다. 불볕더위가 가시지 않은 지난 8월 8일, 인적 드문 5.18 기념공원에서 느꼈던 한기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빗속에 남겨진 세 민주화 투사 동상은 여전히 서울 연희동 방향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전씨가 생전 마지막 외부에 모습을 드러낸 날이자 마지막으로 광주에 방문한 날,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전씨의 재판이 열리기 3시간 전부터 광주지방법원 사방으로 성난 시민들이 모여들었고, 일대 혼란을 예견한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법원으로 가는 길을 철두철미하게 틀어막았다.
전씨 소유 검은색 에쿠스의 번호판은 이미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고 오물 세례까지 여러 번 받았다. 시민들은 그가 탑승한 차량을 단번에 알아봤고, 결국 전씨는 광주 시내에 들어서자마자 고성과 욕설을 참아내야 했다.
법원에 진입하고도 전씨의 수난은 끊이지 않았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광주시민과 유족들에게 사과하지 않겠느냐" "발포 명령을 부인하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이 쇄도했고 급격히 노쇠한 전씨는 한마디 대답하기도 버거운듯 경호원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법정으로 향했다.
전씨 재판이 열리는 법정은 휴대전화조차 갖고 들어갈 수 없었다. 방청객들이 전씨를 향해 소지품을 내던지는 사례가 빈발한 탓이라고 한다. 돌발상황 발생을 염두에 둔 듯 법정에는 평소보다도 많은 방호인력이 배치돼 삼엄한 감시를 펼치고 있었다.
전씨는 재판 시작부터 끝까지 부인 이순자 여사의 도움을 받았다. 부축 없이 스스로 걷지도 앉지도 못할 지경이었고, 피고인이 본인임을 확인하는 간단한 인정신문 조차 이 여사가 보조했다. 젊은 날에는 뛰어난 스포츠맨, 중년에는 신군부정권 수장, 그리고 대한민국 11대 대통령으로 위세를 떨치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전씨는 인정신문이 끝나자 곧 고개를 떨구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재판이 시작되고 20여분이 지났을 즈음 재판부는 호흡 곤란을 호소하는 전씨에게 법정 밖에서 휴식을 취하라고 명령했다. 떠나는 전씨를 향해 방청석 곳곳에서는 불만 섞인 탄식이 터져 나왔고 결국 한 방청객은 분을 참지 못해 "기가 막히네 염X, 참말로 뭔 지X를 하고 있냐!"고 호통쳤다. 전씨가 여과 없이 들은 시민의 목소리로는 사실상 마지막이었다.
광주에서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가는 전씨가 4시간 동안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과거의 영광과 대한민국을 발전시킨 공을 되새겼을 수도 있고, 잠깐이지만 광주에서 겪었던 성난 시민들의 목소리를 되짚었을 수도 있다. 무엇 때문에 권력과 명예를 탐했는지, 지금 자신의 처지는 과연 명예로운지 깊이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을 수도 있다.
다만 군부독재 시절 수많은 시민들을 상처 입히고 죽인 과오를 사죄하겠다는 생각은 끝내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전씨는 마지막 순간까지 진정성 있는 사죄를 남기지 않은 것으로 전해지면서 국민적 공분을 샀다. 진실과 사죄가 앞서지 않으면 용서와 화해도 있을 이유가 없다. 과를 용서받지 못했기 때문의 그의 공 또한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우리 젊은이들이 존경하는 위인이 조선 초 이순신 장군님, 세종대왕님에 그치는 게 안타깝다'는 어느 교수의 한탄이 절감되는 대목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번영을 위해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은 분명 많지만, 공을 덮는 과 또한 적지 않은 탓에 젊은이들이 롤모델로 삼을 마땅한 위인이 없다는 게 그의 지적이었다.
전씨는 결국 대한민국의 발전을 이끌면서도 어두운 과거를 반성하고 청산하기 위해 힘쓴 '위인'으로는 남지 못했다. 누구의 환영도 받지 못한 그의 초라한 마지막 외출을 지켜봤던 한 청년으로서, 그것이 정녕 최선의 선택이었는지 되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