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이 ‘깐느 박’이라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임권택 감독이 세계 4대 영화제로 불리는 베니스국제영화제, 모스크바국제영화제, 칸국제영화제에 1980년대부터 한국영화의 밭을 갈았다면 박찬욱 감독은 2000년대 들어 칸에서 씨를 뿌리고 잡초 뽑으며 밭일을 했다.
‘올드보이’(2003)로 이듬해 심사위원대상을 받고, ‘박쥐’(2009)로 심사위원상을 받을 때 우리에게는 박찬욱이 있어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자존심을 지켰고, ‘깐느 박’ 그만 있다면 언제고 칸의 황금종려상도 우리의 것이 되리라 전망했다.
# 6년 전 놓친 기회 ‘아가씨’
지난 2016년 오랜만에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가 칸 경쟁부문 초청을 받았고, 심사위원대상을 능가하는 상에 대한 기대도 커졌다. 한 사회와 그 안의 개인이 근대로 넘어가고 근대성을 내면화하는 과정을 각기 다른 사회적 신분과 열망을 지닌 인물들을 통해 신랄하게 그려낸 수작이었다. 인물들뿐 아니라 외형으로는 세련되게 내면으로는 추악하게 근대인으로의 상승 갈망에 불타던 코우즈키 집안에 존재하는 3가지 형태의 건물을 통해 근대로의 이행이 형상화됐다.
배우들의 연기는 물론, 화면을 꽉 채운 것으로도 모자라 관객의 피부마저 물들일 것 같은 특유의 색감과 미장센, 이를 종합예술로 승화해낸 수작이었지만 황금종려상 트로피는 박찬욱에게로 오지 않았다. 작품 안에 분명히, 버젓이 다 녹아나 있지만 파격적 노출과 압도적 영상미가 되레 심오한 주제의식에 다가가는 길에 관문들로 놓였다.
비껴간 트로피를 3년 뒤 영화 ‘기생충’이 한국으로 가져왔다. 세계 공통의 문제라 할, 자본주의라는 커튼 아래 엄연히 존재하는 신분과 계급의 차이를 ‘냄새’라는 기막힌 지점을 통해 발가벗겼다. 본능과도 같은 ‘냄새’와 그에 대한 거부와 멸시는 모든 사회적 차이를 일순간 무의미하게 만들며 동물과도 같은 살육을 불러 왔다. 모든 출연 배우들의 명연기, 이를 교향곡 지휘하듯 어우러지게 한 봉준호 감독의 연출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한국에 칸 황금종려상이 두 번 와서는 안 될 이유도 없거니와 다른 이도 아닌 칸이 사랑한 한국의 감독 ‘깐느 박’ 박찬욱이다 보니 그의 신작 ‘헤어질 결심’이 칸 본선 경쟁 부문에 초청됐다는 소식에 내심 최고의 상을 기대하게 되는 게 사실이다.
# 세계적 거장, 다르덴 형제와 나란히 ‘경쟁’
영화제 개막을 앞둔 17일 현재, 본선 경쟁 부문에 오른 21편 영화에 관한 간단 정보만 소개됐을 뿐 작품을 직접 본 것은 아니어서 당연히 그 수상 여부를 전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칸국제영화제 집행위원회가 코로나19 여파에 온라인으로 개최하거나(2020) 시기를 늦춰 아담하게 열었던 것(2021)과 달리 3년 만에 온전히 정성화한 것에 걸맞게 세계의 쟁쟁한 마스터 감독들에게 러브콜을 보냈다는 것이다.
실제로 본선에 오른 감독들을 보면 작품의 깊이나 세계적 명성도에 대단하다. 이미 두 차례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다르덴 형제9장 피에르와 뤽)가 가장 먼저 눈에 뜬다. 벨기에 태생의 형제는 지난 1999년 한물 간 캠핑촌에서 알코올중독 엄마를 돌보며 생계를 위해 세상의 낯선 시선을 온몸으로 부딪쳐 살아가는 소녀의 이야기를 담은 ‘로제타’로 첫 황금종려상을 받았고, 7년 뒤 소매치기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커플이 아이를 낳으면서 벌어지는 일을 통해 인간 최소한의 윤리를 물은 ‘더 차일드’로 두 번째 작품상 트로피의 주인공이 됐다.
다르덴 형제는 국적을 얻기 위한 위장결혼을 둘러싼 미묘한 감정변화와 인간미를 담아낸 ‘로나의 침묵’(2008)으로 각본상, 자전거와 아빠를 잃어버린 소년이 진실을 마주하면서 벌어지는 불안과 위험을 그린 ‘자전거 탄 소년’(2011)으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종교라는 믿음과 사람에 대한 믿음 사이에서 갈등하고 아파하는 소년의 성장기를 잔잔하게 펼쳐 보인 ‘소년 아메드’(2019)로 감독상도 탔다. 사실적 연기로 ‘로제타’(1999)의 주연 에밀리 드켄이 받은 여우주연상, 아들을 죽인 사람이 목공소 제자로 들어온 아버지의 고뇌를 실감나게 연기한 ‘아들’(2002)의 배우 올리비에가 받은 남우주연상까지 합하면 다르덴 형제는 무려 7개의 칸 트로피와 연관돼 있다. 총 8편의 장편영화 연출, 그중 6편의 작품으로 일군 수확이다.
감독상 이후 3년 만에 다르덴 형제가 칸에 출품한 영화는 ‘토리와 로키타’이다. 벨기에에 정착하려는 아프리카 10대 소년 두 명의 이야기를 담는다. 다큐멘터리 같은 소재와 화면으로 우리가 눈감아 외면하고 싶어 하는 우리 세상의 충격적 이야기를 눈앞에 직면 시키는 다르덴 형제 특유의 시선이 이번엔 어떤 곳에 카메라를 들이댔고 심사위원들은 어떻게 평가할지 자못 궁금하다.
# 경쟁 진출 감독 톺아보기
국내에는 유태오 주연의 러시아․프랑스 합작영화 ‘레토’로 이름을 알린 키릴 세레브랜니코프 감독의 신작도 본선 경쟁에 초청됐다. 빅토르 최의 음악적 고뇌와 청춘의 그늘을 되살려낸 ‘레토’는 지난 2018년 칸영화제 당시 최고 평점을 받으며 황금종려상 수상에 근접했으나 수상에 실패했다. 러시아의 연극 연출가인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은 당시 러시아에서 반체제인사로 분류돼 칸에 오지 못 했다.
황금종려상 ‘재수생’이라 할 수 있는 이 감독의 신작은 ‘차이콥스키의 아내’이다. 아내가 외도했다며 이혼소송을 제기했던 차이콥스키, 아내의 동성애 폭로가 두려워 이혼을 포기하며 음악 풍마저 바뀌었다고 얘기되는 세기의 스캔들이 아내의 관점에서 어떻게 그려질지, 세계적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어떻게 쓰였을지 자못 궁금하다.
루마니아 최초의 칸 황금종려상 수상자인 크리스티안 문쥬 감독도 신작 ‘RMN’이 칸의 부름을 받았다. 앞서 ‘신의 소녀들’(2012)과 '엘리자의 내일'(2016)로 각각 각본상과 감독상을 수상했던 문쥬 감독은 2017년 황금종려상으로 직행했다.
1987년을 배경으로 임신중절이 금지된 시기, 아기를 갖게 된 여자 대학생과 불법 낙태를 주선하는 룸메이트를 통해 독재정권과 비밀경찰의 부조리를 그린 ‘4개월, 3주…그리고 2일’이 황금종려상의 주인공이었다. 이번에 초청된 영화 ‘RMN’은 트란실바니아의 다민족 산악마을로 주인공이 돌아온 후 벌어지는 균열에 대한 이야기로 알려졌다.
# ‘주목할 만한’ 감독들의 약진
‘슬픔의 삼각형’으로 본선에 초청된 스웨덴 감독 루벤 외스틀룬드도 황금종려상 수상자다.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2014)으로 칸의 또 다른 경쟁 부문인 ‘주목할 만한 시선’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뒤, ‘더 스퀘어’라는 이름의 전시를 앞둔 큐레이터 앞에 속속 터지는 일들을 그린 블랙코미디 ‘더 스퀘어’로 4년 만에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이번 신작은 모델 커플이 탄 유람선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알려졌는데, 연속되는 예측불허 상황에서 또 어떤 재미를 뽑아냈을지 궁금하다.
외스툴른드 감독 외에도 주목할 만한 시선 출신의 감독들이 대거 이번 본선에 초청됐다. ‘경계선’(2018)으로 대상을 받았던 알리 압바시가 신작 ‘홀리 스파이더’, ‘처음 만난 파리지엔’(2017)으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했던 레오노르 세라이예 감독도 ‘어머니와 아들’로 본선 진출했다. 2018년 영화 ‘걸’로 황금카메라상과 퀴어종려상을 수상했던 루카스 돈트의 신작 ‘클로즈’, ‘리베르떼’로 2019년 특별상을 받았던 알베르토 세라 감독의 ‘섬에서의 고통’도 경쟁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후보작이 됐다.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유명 감독들도 칸에 초청됐다. ‘플라이’ ‘폭력의 역사’ ‘코스모폴리스’로 우명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SF공포 ‘미래의 범죄’에는 비고 모텐슨, 레아 세두, 크리스틴 스튜어트 등 세계적 배우들이 함께했다.
마리옹 꼬띠아르와 호아킨 피닉스의 열연이 빛난 ‘이민자’를 시작으로 ‘잃어버린 도시 Z’ ‘애드 아스트라’ 등 대작을 연출해온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신작 '아마겟돈 타임'도 본선 경쟁에 초청됐다. 그레이 감독 부친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감독 자신이 뉴욕 퀸즈에 살았던 1980년대를 추억한 영화로 앤 해서웨이와 앤서니 홉킨스가 출연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두 거장의 칸 행으로 레드카펫이 세계적 배우들로 화려함을 더하게 됐다.
칸국제영화제는 아니지만, 베니스국제영화제와 더불어 세계 3대 영화제로 불리는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영화 ‘불로’ 은곰상(감독상)을 수상한 클레르 드니 감독의 ‘한낮의 별’, 사에드 루스타이 감독의 ‘레일라의 형제들’,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쇼잉 업’ 등도 황금종려상에 도전한다.
# 그렇다면 본선 진출 한국영화는…
이번에 한국영화는 두 작품을 칸 본선 경쟁으로 보냈다. ‘헤어질 결심’(제작 모호필름, 배급 CJ ENM)과 ‘브로커’(제작 영화사 집, 배급 CJ ENM)이다.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 감독 연출에 배우 탕웨이와 박해일이 주연을 맡고 이정현, 박용우, 고경표가 함께했다. ‘헤어질 결심’에 외국 배우가 출연한다면, ‘브로커’는 연출이 외국 감독이다. 송강호, 강동원, 배두나, 이지은(아이유), 이주영 등 우리나라 배우가 출연하고 일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연출했다.
‘헤어질 결심’은 산 정상에서 추락한 남자의 아내(탕웨이 분)를 용의선상에 올린 형사(박해일 분)의 의심이 관심으로 변하면서 벌어지는 심리적 동요를 따라간다. 진실을 숨긴 용의자와 진실을 파헤치려는 형사가 본분을 잊고 서로에게 끌리는 과정을 박찬욱 감독이 어떻게 그렸을지, 그리고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일지 궁금증을 일게 한다. 익히 미국에서 연출한 영화 ‘스토커’, 영국에서 연출한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을 통해 밀고당기는 진실게임을 통한 숨 막히는 심리전을 보여준 박찬욱이기에 기대가 크다.
‘브로커’는 이미 지난 2018년 ‘어떤 가족’으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에게 연출이 맡겨졌다. 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버린 엄마(이지은 분), 베이브박스 시설에서 일하는 동수(강동원 분)는 성실히 세탁소를 운영하지만 빚에 쪼들리는 상현(송강호 분)와 함께 아기를 훔친다. 나쁜 마음을 먹었다가 아기 ‘우성’을 되찾으려는 엄마를 돕는 상형과 동수의 여정을 지켜보는 형사(배두나 분). 작은 이야기를 인간세상의 큰 비밀과 본질을 드러내는 히로카즈 감독 특유의 시선이 한국 배우들을 만나며 어떤 하모니를 빚었을지 궁금하다.
자웅을 겨루게 될 경쟁 작품 감독들의 면면을 볼 때 결코 황금종려상이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면, 박찬욱 감독의 세계적 위상이 확인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과연, 감독 박찬욱이 팬데믹(전염병의 세계적 대유행) 이후 다시금 막이 오른 칸국제영화제의 첫 번째 영광의 주인공이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어느덧 75회를 맞아 프랑스 남부의 작은 어촌을 세게 영화의 중심지로 바꾼 칸국제영화제는 17~28일(현지시간)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