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추운 곳에서의 뜨거운 연구
극지 생존 미생물부터 우주까지
남·북극 기지·쇄빙선, 연구영역 확대
최근 세계는 급변하는 물결 속에 다양한 생존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 등 자연재해에 대응하기 위한 탄소중립, 감염병 팬데믹을 극복하기 위한 비대면 문화 확산, 디지털 첨단 기술을 접목한 4차 산업혁명 등 저마다 시장 선점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공공기관들 역시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중장기 계획을 수립 중입니다. 하지만 2020년부터 시작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공공기관 역점 사업에 대한 관심은 크게 줄어든 상황입니다. 데일리안이 기획한 [D:로그인]은 공공기관의 신사업을 조명하고 이를 통한 한국경제의 선순환을 끌어내고자 마련됐습니다. 네트워크에 접속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로그인]처럼 공공기관이 다시 한국경제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조명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남극·북극 대기·빙하·해양연구, 지구 미래 환경변화를 감지하다
극지연구소는 남극과 북극을 연구하는 정부출연연구기관이다. 19년 차를 맞이하는 비교적 ‘젊은’ 연구소로 공공과 민간을 통틀어서 가장 추운 곳에서 가장 뜨거운 활동을 하고 있다. 극지연구소는 미생물부터 우주까지 거의 모든 과학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극지연구 글로벌 선도기관이라는 비전 아래, 기후변화에 의한 극지의 변화 감시, 실용화 성과 창출, 새로운 과학영토 개척이라는 목표를 세웠고, 목표 달성을 위해 매진하고 있다.
극지방이 뜨거워지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바뀌는지, 극지의 독특한 환경에서 생존한 생명체들로부터 배울만한 지혜는 없는지 등이 최근의 주된 관심 대상이다.
극지연구소는 2개의 남극과학기지와 1개의 북극과학기지, 쇄빙연구선 아라온호까지 우수한 극지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극지 인프라는 극지에 머물고 연구하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이다.
영하 수십 도의 환경에서 활동하려면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돼야 하고, 기지와 쇄빙연구선은 그런 역할을 한다. 많은 연구들이 장기간 관찰을 요구하는데, 기지가 없다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기지가 '점'이라면 쇄빙연구선은 ‘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극지의 바다를 이동하면서 연구 지점을 잇는 선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극지연구 역사는 대략 3~40년. 길게 잡아도 50년을 넘지 않는다. 선진국의 절반에 불과하지만, 단기간에 그들과 경쟁할 수 있었던 것은 연구원들의 노력과 함께 극지 인프라의 안정적인 운영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남극에는 세종기지와 장보고기지가 있고, 이 두 남극기지는 전혀 다른 환경에 위치해 있다. 같은 남극이지만 주목하는 연구에도 차이가 있다. 세종기지에서는 기후변화 연구를 비롯해 해양과 대기, 생물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고, 장보고기지에서는 우주나 빙하, 운석 연구 등도 수행 중이다.
북극 다산기지에서는 북극의 지질과 빙하환경, 생태 등이 연구 대상이다.
아라온호는 7~9월에는 북극해,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남극 바다를 항해한다. 지구온난화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해저에서 탐사하고, 빠르게 녹고 있는 바다 얼음을 현장에서 관측한다. 지각 아래, 지구 형성의 퍼즐 조각을 찾는 것도 아라온호가 있어서 가능한 연구다.
기후변화와 극지연구…생태계 변화·보호에서 자원 활용 연구까지
극지는 기후변화에 가장 민감한, 그래서 가장 변화가 빠르게 일어나는 곳이다. 최근 몇 년간 알래스카와 시베리아 심지어 남극에서는 유래 없던 고온이 기록됐다. 우리나라에서 나타나는 극단적인 기상현상도 극지와 무관하지 않다.
극지연구소는 북극의 고온 현상이 북극과 중위도 간 대기의 균형을 깨뜨려서 한반도나 다른 중위도권 나라에 이상기후 현상이 발생하는 원인을 밝힌 바 있다.
남극 대륙 위에 놓인 빙하는 바다로 빠질 경우 해수면을 끌어올려 연안국들에 피해를 줄 수 있다. 남극의 빙하가 모두 사라지면 지구의 해수면은 약 60m 상승하는데, 현재 가장 취약한 지역은 서남극이다.
극지연구소는 아라온호로 서남극을 탐사해 얼음이 어떤 과정을 통해 녹는지 밝혔다. 극지방의 변화는 그곳을 터전으로 삼는 생물들, 그리고 생태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뜻해지면서 서식지가 넓어지고 개체 수가 늘어난 생물들도 있지만 극지의 추운 환경에 적응 진화했다가 집을 잃고 멸종 위기에 처한 생물들도 있다. 극지연구소는 이런 생태계 변화를 감시하고 이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극한 환경에서 살아남으며 독특한 유전정보를 가진 극지생명체의 지혜를 배우기 위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영하의 온도에서 얼음 결정의 형성을 막아 세포 등을 보호해주는 '결빙방지 단백질'은 의약품, 농업 등에 활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결빙방지 단백질 기술을 바이오 전문기업에 기술을 이전하는 성과도 있었다. 해당 기업은 주름 개선, 노화방지 기능성 화장품 개발에 해당 기술을 활용할 계획이다. 저온에서도 잘 반응하는 효소 등도 의약품, 공업품에 쓰임새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극지연구소는 지구 형성의 퍼즐도 찾고 있다. 남극과 호주 사이 바다를 탐사해 새로운 맨틀 존재의 증거를 밝혔고, 남극에서 1000개 이상의 운석 시료도 확보했다. 운석에는 우주 진화의 과정이 기록돼 있다. 빙하와 퇴적물을 분석해 수~수십만 년 전 과거 지구의 모습도 복원하고 있다. 고기후 연구는 단순히 과거를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지구의 기후변화에서 인간의 영향을 찾아내는 연구에 활용된다.
극지연구 기술, K루트 개척…연구 선도국 가능성을 연다
2020년 해양수산 과학기술 수준 평가와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발표한 극한공간 인프라 기술 수준 평가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선진국 대비 약 70%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약 5년 정도의 기술격차로, 이 간격을 좁히기 위해 정부도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극지활동 진흥법, 2050 북극활동 전략을 내놓으면서 극지연구 선도국 도약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극지연구소는 기술격차를 줄이는 것과 함께, 극지연구소만이 할 수 있는 분야를 찾고 경쟁력을 확보하는 일에도 집중하고 있다. 어는 것만으로 오염물질이 사라지는 얼음화학기술이나, 극지 생명체를 활용한 의약품 개발 연구는 특히 발전 가능성이 많은 분야로 꼽힌다.
K루트 개척도 극지연구소만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도전이다. K루트는 남극내륙으로 가는 안전한 육로를 찾는 탐사를 말한다. 남극내륙 육상 루트는 전 세계에서 미국, 러시아 등 6개 나라만 보유하고 있다.
남극은 평균 고도가 2000m가 넘는 지구에서 가장 높은 대륙으로, 해안가에서 내륙으로 들어가려면 빙하 덮인 경사 지역을 지나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크레바스 같은 위험요소를 만나게 된다. 내륙에 기지를 세우거나 연구거점을 운영하려면, 인력과 장비 등의 보급을 위한 내륙 루트가 필수적이다.
우리나라는 2017년부터 K루트 탐사에 나섰고, 지난해 1740km의 남극 내륙루트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강성호 극지연구소장 “차세대쇄빙연구선 건조, 또다른 기회될 것”
지난달 31일 윤석열 대통령의 바다의날 기념사에 '극지 탐사와 연구'가 언급됐다. 대한민국 해양과학기술의 미래 먹거리 중 하나로 극지를 꼽은 것이다.
극지에서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은 과학연구다. 우리나라 쇄빙연구선 아라온호는 북극 보퍼트해의 캐나다 배타적 경제수역(EEZ) 안에서 연구 항해를 수행한 적이 있다.
아라온호의 기술력과 우리 연구팀의 과학 역량을 인정받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과학연구가 뒷받침돼야만 북극과 남극의 '심상치 않은' 변화를 감시하고, 빠르게 변하면서 나타난 기회를 잡을 수 있다.
특히 급격한 기후변화의 원인과 예측을 위한 북극해에서의 본격적인 연구를 위해 기존 아라온호에 대비해 강화된 쇄빙능력과 성능이 우수한 차세대쇄빙선 건조에 대한 필요성이 꾸준히 거론돼왔고, 최근 건조사업 추진이 결정됐다.
강성호 극지연구소장은 “지난해 극지연구소에는 좋은 일이 연이어 찾아왔다”면서 “우리 활동의 법적 근거라 할 수 있는 극지활동진흥법이 시행됐고, 아라온호와 함께 극지를 누빌 차세대쇄빙연구선 건조가 결정됐다. 더 뛰어난 연구 결과로 국가적인 지원에 보답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