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족들에게 남겨진 단장의 고통
아무리 공격하기 바빠도 그렇지
吳와 越도 위기에는 손을 잡는다
즐겁고 흥이 넘치는 시간을 갖자고 모였던 사람들이 어처구니없는 참변을 당했다. 잠깐 동안에 154명이 목숨을 잃고, 149명이 다쳤다(31일 오전 6시 기준). 아무 탈 없이 이어질 것으로 믿었던 일상이 한 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그곳에 가기 전까지는, 가서까지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변고였다. 떠난 이들의 고통은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단장의 고통은 유족들에게 고스란히 떠안겨 졌다. 누가 이 슬픔을 이해한다고 할 수 있으랴(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마음 다해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유족들에게 남겨진 단장의 고통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사고이지만 이미 일어나고 말았다. 되돌릴 수 없는 일이라면 수습이라도 제대로 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는 게 산 사람들의 책무이고 도리다. 윤석열 대통령이 사고 수습 때까지를 국가애도기간으로, 용산구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한 것이 그 일환이다, 그는 대국민담화를 통해 “국정의 최우선 순위를 본건 사고의 수습과 후속 조치에 두겠다”고 밝혔다. 당연한 다짐이다.
그런데 이 엄청난 비극 앞에서 “이태원 참사는 청와대 이전 때문에 일어난 인재”라며 공격부터 하고 나선 사람이 있다. 애도를 먼저 하는 게 순서일 텐데 그의 공격본능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의 페이스북 글은 이렇게 이어졌다. 민주당 부설 민주연구원 남영희 부원장 이야기다.
‘백번 양보’하는 게 어떤 것인지, 뭘 양보한다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대통령실 경비는 서울경찰청 소속의 경비단들이 담당하고, 용산서 전체 인력은 800명이라고 한다(뉴데일리, 10.30). 그렇다면 용산서는 그 일 외의 업무는 전혀 수행하지 못한다 말이 된다. 게다가 ‘혈안’은 좋은 뜻으로 쓰는 경우가 거의 없다. 마약 및 성범죄 단속에 왜 ‘혈안’이 된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설명해줄 필요가 있다. ‘희귀한 대통령’은 또 어떤 의미인가?
아무리 공격하기 바빠도 그렇지
이쯤 되면 그 의도가 무엇인지, 뭘 바라서 이런 글을 날이 밝자마자(아침 7시 58분쯤) 숨 가쁘게 올렸는지 짐작할 만도 하다. “이게 나라냐?” 그들의 상투어다. 이것으로 국민을 선동하겠다는 뜻 아닌가?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되지만 마치 ‘세월호 참사’와 같은 대형 사건을 기대하고 있었던 듯 한 표현 방식이어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남씨의 혼잣말이 아니라 민주당 정서를 대변한 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해지기까지 한다. 서둘러 글을 삭제했다고 해서 그 의도가 함께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악담은 정치언어일 수가 없다. 저주도 마찬가지다.
맨 마지막에 겨우 붙인 애도의 한 마디다. 희생자들의 영혼과 그 유족들의 슬픔을 진심으로 위로할 생각이 거의 전해지지 않는, 메마른 인사치레로만 들린다. ‘ㅠ’는 또 뭔가. 조의를 표한다면서 이런 인터넷식 표기(눈물표시)를 하다니! 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 부원장의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희귀한’ 심성과 매너에 기가 막힐 뿐이다.
반면에 이재명 당 대표는 격식과 격조를 갖춘 코멘트를 했다. 30일 국회에서 긴급 최고위원 회의를 주재한 다음 기자들과 만나서 “민주당은 다른 어떤 것도 다 제쳐두고 정부의 사고 수습과 치유를 위한 노력에 초당적으로 적극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지금은 사고 원인 규명, 재발 방지 대책도 중요하지만 수습에, 또 피해 가족들의, 피해자분들의 치유와 위로에 집중할 때”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거대 제1야당의 대표가 일의 경중과 선후를 제대로 판단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스럽다. “피해자, 망인 여러분 죄송합니다”라며 고개를 떨궜다는 대목에선 위안을 느끼게도 된다. 이를 계기로 다른 모든 국정 현안과 과제들에 대해서도 초당적 협력의 자세를 갖춰주기 기대한다(물론 이 대표 개인이 아니라 민주당에 대해).
흔히 인용되는 고사이지만 ‘오월동주(吳越同舟)’를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손자(孫子)》의 ‘구지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吳와 越도 위기에는 손을 잡는다
“옛 부터 서로 적대시해 온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타고(吳越同舟)’ 강을 건넌다고 하자.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큰바람이 불어 배가 뒤집히려 한다면 오나라 사람이나 월나라 사람은 평소의 적개심을 잊고 서로 왼손 오른손이 되어 필사적으로 도울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나라안팎으로 호된 시련을 겪고 있다. 지금까지 피땀 흘려 이룬 민주정치와 선진경제가 자칫 치명상을 입을 수 있는 정도의 위기다. 이를 극복해낼 수 있는 힘은 국민적 단합에서 나온다. 그 제1과가 정부와 정치권, 여당과 야당의 초당적 협력이다. 물론 여야는 경쟁의 관계에 있다. 그렇다 해도 선거 전의 일정 기간을 제외하고는 협력 체제 가동이 가능하다. 정치인들이 진실로 나라와 국민을 위한다면 상황이 파국에 이르기 전에 붙잡아 세울 줄 아는 지혜를 발휘할 일이다.
다만 조건이 있다. 상생공영적 협력과 이해타산적 타협은 엄격히 구분돼야 한다. 특히 협력을 명분으로 부정한 타협이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따지고 보면 민주당 이 대표의 ‘초당적 협력’ 다짐은 거대 정당에 부여된 당위의 책무다. 더욱이 협력의 주체는 민주당이지 개인 이 대표가 아니다.
명실상부한 초당적 협력, 진정한 정치평화가 구현되려면 각 당이 자체 내의 모순부터 해소해야 한다. 민주당의 경우 ‘이재명 사법 리스크’를 털어내는 게 급선무다. 초거대 정당이 이 대표 한 사람의 방탄복 노릇이나 하는 한 정치의 민주적 성숙은커녕 현상유지도 어렵다. 국민적 슬픔과 고통의 시간이 ‘이재명 구하기’와 맞바꿔지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이 대표의 유죄를 예단하고 하는 말이 아니다. 민주당이, 이 대표의 독려 속에 진실규명 그 자체를 가로막고 나서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이 대표의 ‘피해자, 망인에 대한 사죄’가 이 상황을 개인적 위기탈출의 기회로 이용하려는 술책이 아니라 정치지도자로서의 진정한 자기성찰로 인식되려면 정직하고 겸허할 것이 요청된다. 그것이 역사 속에 곧게 또 오래 살아남는 길이다.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