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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천하 시진핑 시대, 풍도와 왕후닝


입력 2022.11.04 05:05 수정 2022.11.04 20:26        김규환 기자 (sara0873@dailian.co.kr)

馮, 끈질긴 생명력의 전형…5개 왕조, 8개 姓 11명 군주 섬겨

처세의 ‘달인’과 충심으로 백성을 위하는 ‘능신’ 평가 엇갈려

王, 최소 32년간 江·胡·習 전현직 3명 국가주석 모시는 책사

향후 중국 모습이 어떤 지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 판가름 날듯

중국 5대10국시대에 27년 간 재상의 자리를 지키며 5개 왕조, 8개 성씨 11명의 군주를 보좌한 풍도의 초상화. ⓒ 바이두

중국의 ‘5대10국시대’(907-960)는 대혼돈의 시기였다. 그들은 아무 것도 믿지 않고 오로지 손에 쉰 칼만 믿었다. 군신을 죽이고, 부자를 죽이고, 형제를 죽이고, 적을 죽이고, 동패까지도 죽였다. 손을 먼저 쓰는 사람이 강자이고, 주저하면 먼저 죽었다. 그 만큼 음모와 반란, 전쟁으로 유혈이 낭자한 시대였다.


이런 시대를 살다가 간 풍도(馮道·882-954)는 끈질긴 생명력의 전형을 보여준다. 50년 관료생활 동안 재상만 27년을 지내며 5개 왕조, 8개 성씨 11명의 군주를 섬긴 만큼 ‘처세의 달인’이라는 곱지 않은 시선과 백성에 대한 측은지심으로 임금을 보좌하고 관료로서 책임을 다한 '나라의 능신(能臣)'이라는 상찬이 엇갈리는 논쟁적 인물이다.


‘황소(黃巢)의 난’(875~884)이 중국을 휩쓸 때 태어난 풍도는 조상 중에 이름을 날린 인물이 없는 한미(寒微)한 집안 출신이다. 다만 문학적 재능이 출중해 26살의 나이로 연(燕)나라 왕 유수광(劉守光)의 책사로 발탁돼 관료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가 참살 당하자 곧장 새 집권세력에 의탁해 벼슬길을 이어갔다. 타고난 처세술 덕분이다.


그의 처세론은 '하늘에 순응하고, 시기에 따르고, 사람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유수광과 같은 폭군 앞에서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익혔다. 윗사람의 그릇을 읽고 따를 필요가 없으면 쫓지 않았다. 눈 앞의 이익보다는 청렴을 앞세워 다음 천자의 부름을 받았다.


923년 후당 장종(莊宗)이 즉위하자 41살의 나이로 한림학사로 임명됐고 4년 뒤 명종(明宗) 때 드디어 재상에 올랐다. 이후 다섯 왕조 8개 성씨의 11명 군주를 섬겼다. 11명의 군주를 보필한 그의 충심을 의심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송나라 구양수(歐陽脩)는 "숱한 왕조와 거란을 번갈아 섬긴 풍도가 그간 받은 관직을 영광으로 섬기면서 집안에서 효도하고 나라에는 충성했다고 말한다"고 사뭇 비아냥조로 폄하했다. 사마광(司馬光)도 "풍도가 재상으로 5왕조와 8성씨를 섬긴 일은 나그네가 객방을 스쳐가는 일과 같다. 그가 몇가지 선한 일을 했다 한들 어찌 괜찮다 말하겠는가"라고 평가절하했다.


반면 풍도가 숱한 왕 밑에서 재주를 펼친 것은 철저한 자기관리 덕이라는 시각도 만만찮다. 그는 막사에서 짚더미를 깔고 자고 녹봉을 받으면 밥을 지어 부하부터 먹였다. 낙향해서는 밭을 갈고 남의 밭도 몰래 갈아 놓기도 했다. 전쟁통에 끌려온 부녀자들을 사서 돌보다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기근이 들면 곳간을 풀어 백성들에게 양식을 나눠줬다.


명나라 李贄(卓吾)의 평가는 이렇다. "'사직이 중요하지 임금은 중요하지 않다'는 맹자의 말처럼 풍도는 이 둘을 잘 구분할 줄 알았다. 사(社)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고 직(稷)은 백성을 먹여 살리는 것이다. 풍도가 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백성을 편안하게 먹여 살리려고 노력한 덕이다."


중국 공산당은 지난달 23일 20기 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를 열고 정치국 상무위원 7명을 선출했다. 당시 시진핑 국가주석의 뒤로 리창 상하이 당서기, 자오러지 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왕후닝 당중앙서기처 서기, 차이치 베이징 당서기, 딩쉐샹 중앙판공청 주임, 리시 광둥성 당서기가 당서열 순서대로 기자회견장에 입장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천년을 뛰어넘어 지난달 중국 정치국 상무위원에 유임된 왕후닝(王滬寧) 역시 끈질긴 생명력의 화신이다. 당서열 4위로 내년 3월 전국정협 주석에 선출될 예정이다.


상하이 푸단(復旦)대 교수 출신인 그는 최소 32년 간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과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에 이어 시진핑(習近平) 주석에 이르기까지 3대 ‘황제’를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책사다. 장 전 주석이 발탁하고, 후 전 주석이 부렸으며, 시진핑이 중용한 인물로 불린다.


1955년 상하이에서 태어난 왕후닝은 화둥(華東)사범대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했다. 상하이출판국에서 근무하다 1981년 푸단대 국제정치대학원에서 법학석사를 받은 뒤 학교에 남아 부교수, 교수를 지냈다.


장 전 주석의 측근인 쩡칭훙(曾慶紅)의 발탁으로 1995년 당중앙정책연구실에 들어오며 정계에 진출했다. 정책연구실 정치팀장을 지내고 부주임을 거쳐 2002년 주임을 맡았다, 주임으로 재직하며 당장(黨章·당헌)에 오른 장 전 주석의 ‘3개대표론’, 후 전 주석의 ‘과학적 발전관’을 정립했다. 2012년 정치국위원으로 승진했다. '정책연구실 구성원은 정치국원이 될 수 없다'는 관례를 깼고 2017년 상무위원에 올라 최고 지도부에 입성했다.


시 주석의 ‘중국몽(中國夢·중화민족 부흥)’과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 사상'도 그의 작품이다. 시 주석은 총서기로 내정되자 왕후닝을 불러 치국구상에 대해 얘기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시 주석은 계획경제 하의 당이 특권을 대변했다면 개혁·개방 하의 당은 부패를 대변한다는 반성적 인식 아래 당내 민주화와 이를 실천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한다고 강조해 그가 '시진핑 사상'의 골격을 만들었다는 후문이다.


특히 건국 100주년인 2049년까지 중국을 '전면적 사회주의 현대화국가'로 탈바꿈시키고, 미국에 맞서 '자강론'에 입각한 부국강병을 외치는 시 주석의 여러 언명은 왕후닝이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아직 자신이나 직계가족이 비리에 연루됐다는 보도가 흘러나온 적이 없다. 물론 그가 권력의 정점에 있는 까닭이기도 하고 직무 자체가 비리에 연루되기에는 거리가 멀기도 하다. 때문에 그가 ‘처세의 달인’인지 아니면 ‘나라의 능신’인지에 대한 포폄은 향후 중국의 모습이 어떤지에 따라 판가름이 날 것이다.


글/김규환 국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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