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도 위한) 대사 뉘앙스는 물론, 문화적 차이를 고려한 감수성까지 요구”
“자막의 장벽, 그 1인치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여러분은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
지난 2020년, 봉준호 감독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영화 ‘기생충’으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며 말한 소감이다. 해외에서는, 특히 자국의 할리우드 영화에 익숙한 미국인들은 자막 읽기를 꺼려하며 비영어권 국가의 작품에 배타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는 곧 비영어권 콘텐츠의 해외 진출에 한계가 되곤 했었다.
봉 감독의 바람은 꽤 단기간 내에 이뤄졌다. 넷플릭스를 비롯한 글로벌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들이 전 세계 시청자들의 일상을 파고들면서 이제는 국가의 벽을 넘나드는 것이 자유로워진 것이다. 특히 한국 콘텐츠의 약진이 벽을 허무는 속도를 가속화했다.
영화 ‘기생충’에 이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 구독자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으면서 영어권 시청자들이 자막, 더빙 등의 수단을 통해 비영어권 콘텐츠를 접하는 것 또한 한층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오징어 게임’ 이후에도 ‘지금 우리 학교는’, ‘지옥’, ‘솔로지옥’, ‘정이’ 등 여러 드라마, 예능이 글로벌 흥행에 성공했었으며, ‘오징어 게임’은 비영어권 최초로 에미상 감독·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이제는 글로벌 무대 중심에서 한국 콘텐츠들이 활약 중이다.
활발한 번역은 비한국어권 대중들이 한국 드라마, 영화는 물론 타 분야에도 관심을 가지게끔 했다. 소설은 번역되는 도서 장르와 언어가 다양해지면서 지속적으로 해외 수상 소식을 들려줬고, 웹툰은 미국뿐 아니라 유럽까지 독자층을 넓히고 있다.
지난해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을 받아 해외에서 출간된 한국문학은 27개 언어권 150여 종에 이른다. 지난 2021년 29개 언어권에 180여 종이 번역된 것과 비교해 소폭 줄어들기는 했다. 그러나 한국문학번역원의 분석에 따르면 장르의 다양성이 확대되고 현지의 영향력 있는 출판사를 통한 출간이 확대되는 등 해외 문학·출판시장에서 한국문학의 인지도가 상승 중이다.
이런 흐름은 지난해 국제 문학·번역상에서는 4편의 한국문학이 수상의 영예를 안는 결과를 낳았다. 손원평의 ‘서른의 반격’은 일본 서점대상 번역소설 부문에서 수상했으며. 김금숙의 ‘풀’은 체코 뮤리엘 만화상을 받았다. 김소연의 ‘한 글자 사전’은 일본 번역대상을, 이영주의 시 ‘차가운 사탕들’은 미국 루시엔 스트릭 번역상을 차지한 것. 한국문학번역원에 따르면 상은 받지 못했지만 입후보한 경우도 9편으로 집계됐다.
국내 매출 규모가 1조 5000억원을 돌파한 한국 웹툰 산업은 자연스럽게 해외로 눈을 돌렸다.
네이버는 지난 2021년 1월 북미 최대 규모의 웹소설 플랫폼 왓패드를 인수한 데 이어 글로벌 웹툰 플랫폼 태피툰에 투자하는 등 북미, 유럽 시장에서의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다. 카카오 또한 타파스, 래디쉬, 우시아월드를 인수하고 유럽에 픽코마 유럽 법인을 설립하며 적극적인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드라마 ‘사내맞선’, ‘지옥’, ‘지금 우리학교는’ 등 웹툰을 원작으로 한 작품들이 해외 시청자들의 관심을 받으면서 원작이 해외에서도 소개돼 인기를 끌기도 한다. K-콘텐츠 열풍과 맞물려 국내 웹툰을 향한 해외 독자들의 관심도 더욱 커질 것이라는 긍정적인 전망이 이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자막, 번역 등은 새롭게 각광받는 분야로 꼽히고 있다. 지난 2021년 넷플릭스가 ‘파트너 데이’ 행사를 통해 한국 콘텐츠의 세계적인 흥행을 통해 약 5조 6000억 원의 경제적 파급효과와 약 1만 6000명의 일자리 창출 효과를 만들어낸 것으로 추정한다고 밝혔었다. 촬영, 편집부터 더빙, 자막, 특수효과 등 콘텐츠와 관련된 다양한 분야에 K-콘텐츠 열풍의 긍정적인 영향이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었다.
특히 한국 콘텐츠를 수출할 때 반드시 선행돼야 하는 번역 시장은 ‘호황’이라고까지 평가된다. 콘텐츠가 국가의 벽을 넘나들기 위해선 자막이 꼭 필요한 요소이며, 이제는 자막의 퀄리티까지도 시청자들의 평가 대상이 되면서 중요성 또한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 영화 관계자는 “현재 토대는 마련이 된 만큼, 그 위에서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선 완성도를 꾸준히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는 세부적인 부분까지도 신경을 써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며 “대사의 뉘앙스 같은 부분도 있지만, 문화적 차이를 고려한 감수성까지 생각하면, 번역가의 중요성은 앞으로 더 크게 인식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