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시 방정환아카데미, 오로지 시비로만 100억 원 가까이 투입되는 사업
새로운 것 없이 기존 교육지원사업에 포장지만 바꾸는 게 아닌지 우려
잘못되었다는 지적 아닌 더 특색 있고 멋진 사업으로 구리 도시브랜드 제고되길 원해
지난 2월 13일, 본지에 실린 ‘[기자수첩-수도권]구리시의 방정환아카데미 건립 계획, ‘왜 방정환인가?’부터 생각하라’(https://www.dailian.co.kr/news/view/1201388/)에 대해 구리시가 15일, “오해할만한 내용”이 있다며 설명자료를 내고 해명에 나섰다.
구리시는 설명자료에서 “방정환 선생은 아동문학가이며, 출판인, 사회운동가이기도 하지만, ‘아동중심’의 교육론을 설파하며 우리 사회의 어린이들이 올바르게 성장하길 바랐던 교육철학과 방법론을 갖춘 교육가이기도 하다”며 “특정 연구에서는 방정환 선생의 주된 관심은 ‘어린이의 올바른 성장’이었으며, 그의 활동의 본질은 문학이나 예술이 아닌 ‘교육’이었다고 강조”했다고 말하며 방정환 선생의 본질이 ‘문학’이나 ‘예술’이 아니라 ‘교육’이라고 강변했다.
구리시는 이에 대한 근거로 3개의 연구자료(김용휘 ‘방정환의 교육철학과 동학사상’, 안경식 ‘소파 방정환의 아동교육운동과 사상’, 임재택·조채영 ‘소파 방정환의 유아교육사상’)를 제시하고 향후 “방정환 선생의 교육철학을 계승·발전하여 운영할 계획”이라며 애초의 방향을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구리시의 정성스런 설명자료에 감사드리며 이에 대한 답을 드리고자 한다.
당시 ‘기자수첩’에서 언급한 내용은 ‘▲방정환 선생은 교육자가 아니다 ▲방정환아카데미는 이웃 지자체의 사업을 그대로 카피해 가져왔다 ▲구리시의 도시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차별화된 사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깊이 있는 연구와 토론을 통해 구리시만 할 수 있는 특색 있는 방향과 내용을 갖추자는 제안이었다.
그런데 구리시의 설명은 몇 가지 면에서 불충분한 지점을 지니고 있다. 3~4가지의 질문과 제언 중에 하나인 ‘방정환 선생은 교육자가 아니다’라는 지적에 대해서만 해명을 했기 때문이다.
우선 “방정환 선생의 활동의 본질은 문학이나 예술이 아닌 ‘교육’”이라는 구리시의 주장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예술의 목적은 교육이 아니다. 다만 교육이 교육의 수단으로 예술을 사용할 수 있기는 하다. 교육이 수단으로 예술작품을 가져오는 것은 자유이지만 그것으로 예술 자체의 본질을 교육이라 말하는 것은 엄청난 왜곡이다. 그것은 자의적 해석일 뿐이다.
일단 팩트부터 살펴보자. 학술논문검색사이트 KISS에서 ‘방정환’을 검색하면 총 286개의 학술논문이 올라온다(2023년 2월 15일 기준). 286개 논문 중에 방정환 선생과 함께 ‘교육’을 언급한 논문은 11개에 불과하다. 관련 연구 중 4%가 되지 않는다. 방정환과 교육의 연관성이 4% 이하라는 뜻이다.
이러한 것을 근거로 방정환을 교육과 연결시키려는 것은 꼬리를 흔들어 몸통을 제어하려는 어리석은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관련 논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 천도교의 사상을 방정환과 연결시키고 있다. 방정환의 교육사상이 아니라 천도교의 교육사상을 말하고 있다는 뜻이다(방정환은 천도교 교주였던 손병희의 사위였다.). ‘방정환의 교육철학과 동학사상-무위이화의 생명원리와 모심의 영성을 중심으로(김용휘)’, ‘천도교 개벽사상을 기반으로 한 방정환 어린이교육운동의 현재적 함의(이정아)’, ‘일제하 천도교의 소년교육운동과 소파 방정환(정혜정)’ 등은 방정환의 교육사상이나 교육이론을 직접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방정환의 활동에 대한 해석으로 천도교사상을 가져오고 있다.
명지원의 ‘방정환의 아동교육사상에 대한 연구’를 살펴보면 “소파는 출판문화운동, 유소년단체운동, 아동문학운동을 통하여 교육운동을 실천하였기 때문에 그의 교육사상은 그의 저서 및 활동을 통해 해석해야 한다”라고 기술하고 있을 정도다. 또한 “소파는 동학의 아동존중사상을 바탕으로 유가전통으로부터의 아동해방과 새로운 교육문화를 창조해냈다. 그가 전적교육이라고 표현한 전인교육의 내용 중 특히 예술교육에 대한 이해는 그의 인간이해와 교육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는 예이다”라고 말하며 특히 예술에 방점을 찍고 있다.
이정아도 자신의 논문 ‘방정환의 아동예술교육의 내용과 교육적 의의’에서 “방정환은 어린이교육운동의 교육내용으로 어린이들의 정서를 함양할 수 있는 아동예술 교육을 중요하게 여겼다”라며 교육 중에서도 특별히 예술에 중점을 두고 기술하고 있다.
구리시가 해명자료에서 언급한 안경식의 논문 ‘소파 방정환의 아동교육 운동과 사상’의 내용을 살펴보면 “소파가 남긴 동요나 동화·소년소설 등 많은 아동문학 작품을 분석해 볼 때 그는 동학사상에 바탕을 두고 자신의 아동교육관을 실천하기 위해 작품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며 방정환이 남긴 문학작품을 동학사상으로 해석하고 있다. ‘방정환이 그렇게 했다’가 아니라 ‘보인다’라고 말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안경식의 주관적 해석이라는 뜻이다. 방정환이 직접 그런 언급을 한 기록은 전혀 없다.
구리시가 근거로 내세운 김용휘의 ‘방정환의 교육철학과 동학사상’ 또한 앞서 설명한 연구와 마찬가지로 해석의 분야에서 연구된 것에 불과하다. 임재택의 ‘소파 방정환의 유아교육사상’도 같은 모습이다. 저자는 본문에서 “소파 방정환은 어린이는 선한 존재이고, 어린이는 곧 하늘이며, 어린이를 섬기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같이 동학사상에 바탕을 둔 것이 소파의 유아교육사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대부분의 학술연구는 방정환의 문학과 아동문화운동에 집중하고 있으며 나머지 4%가 되지 않는 특정 연구물이 방정환의 교육사상에 관심을 보일 뿐이다. 게다가 그러한 연구는 천도교와 동학사상을 중심으로 하거나 예술에 집중하고 있다. 결국 ‘교육’은 방정환의 ‘핵심 키워드’가 아니라 외곽을 맴도는 ‘관련 키워드’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방정환의 교육철학 혹은 교육사상은 천도교(동학) 사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구리시는 21세기인 오늘날, 천도교 사상을 교육에 도입하겠다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특정인의 이름에 ‘사상’을 붙이기 위해서는 그 사상에 기여한 지분이 크고 확실하게 있어야 한다. 지분이 크고 확실하지 않다면 이전의 사상을 계승한 것일 뿐이다. 방정환에게 교육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천도교 사상을 계승한 것이지 방정환이 만든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럴 경우에는 새롭게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천도교와 동학에 소유권이 있다는 뜻이다. ‘방정환의 교육사상’이 연구자들 사이에 메인 테마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방정환의 교육사상’은 ‘방정환의 천도교사상’으로 대체되어야 마땅하다.
뿐만이 아니다. 구리시는 해명자료에서 ‘인근 지자체(중랑구)의 사업을 따라한다’는 지적과 ‘구리시의 도시 브랜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또한 ‘연구와 토론을 통해 특색 있는 방향과 내용을 갖추자’는 제언도 외면하고 있다.
‘방정환아카데미’는 총 사업비로 98억 6800만 원이 투입되는 사업이다. 게다가 정부나 경기도의 지원 없이 오로지 시비로만 진행된다. 이런 사업을 너무 안이한 판단으로 졸속 진행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는 뜻이다.
교육지원사업은 늘 해오던 사업이다. 새로운 사업이 아니다. 그러므로 뜬금없이 ‘방정환’을 붙일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정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면 적어도 방정환 선생의 핵심적인 특징을 포함하고 내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체 연구논문 중에 4%에도 미치지 못하는 극히 일부인 연구결과를 가지고 ‘방정환은 교육자다’라고 강변하는 것은 너무 옹색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양(羊) 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양두구육(羊頭狗肉)’이 떠오른다고 말하면 너무 지나친 것일까? ‘방정환’이라는 이름만 붙여놓고 기존에 해오던 교육지원사업을 진행하겠다고 하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일이다. ‘방정환’이라는 이름이, 아무나 가져와서 멋대로 재단해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심한 오해라고 할 수 있다. 포장지를 바꾸었다면 내용물도 바뀌어야 한다.
구리시의 교육지원사업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방정환’이라는 이름을 가져오고 싶다면, 더 깊이 연구하고 절차탁마해서 ‘방정환’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다른 자치단체와 차별화를 이루어 구리시만의 특색을 지닌, 구리시의 도시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자는 뜻이다.
이러한 제언이 부담스럽다면 ‘방정환’이라는 이름을 포기하면 된다. 예전에 늘 하던 교육지원사업을 그대로 진행하면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일이든 새롭게 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이름만 바꾸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주역(周易)》에 나오는 ‘대인호변 군자표변 소인혁면(大人虎變 君子豹變 小人革面)’을 기억해야 한다. “얼굴빛만 바꾸지 말라. 호랑이처럼, 표범처럼 개혁하라”는 《주역(周易)》의 충고는 아직도 유효하다. 얼굴 표정만 바꾸고 이름만 교묘히 바꾼다고 새로운 것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