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하만 인수 이후 잠잠한 대형 M&A
삼성, 반도체 회복 및 조직 쇄신에 더 주력
긴 호흡 갖고 AI, 컴퓨팅, 로봇 투자 저울질할 듯
"빅딜은 기대가 큰 만큼 여러 변수가 있고 넘어야 할 산이 많아 쉽게 의사결정을 못하고 있다."(2024년 9월 8일,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
삼성의 대어(大魚) 인수 소식이 올해에도 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에 무게가 실린다. 그간 모바일·반도체·전장 등 여러 타사 사업부 인수 가능성이 제기됐으나 소문만 무성할 뿐 구체화된 곳은 없어서다.
해외 스타트업 등 일부 사업 인수·투자는 있었지만 하만 이후 대형 M&A(인수·합병)라고 할 만한 건은 여전히 신중을 기하는 모습이다. 주력 사업인 반도체가 휘청이면서 인수·합병에만 집중하기가 어려워진 것도 한 몫한다. 본업 정상화가 최우선순위에 놓이면서 'M&A' 결정도 덩달아 지연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28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의 대형 M&A 투자 지연은 글로벌 경제 안보 기조 강화, 반도체 등 본업 경쟁력 회복 등 대내외 요인이 한 데 얽혀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앞서 한종희 디바이스경험(DX)부문장(부회장)은 IFA 2024 기간인 지난 9월 초 기자간담회에서 "기존 사업 강화 방안으로 M&A 기회를 항상 살핀다. 미래 사업 확보 차원에서도 기회를 찾고 있다"면서도 "넘어야 할 산이 많아 쉽게 의사결정을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언급했다.
주력 사업 강화 뿐 아니라 제 2 반도체·바이오가 될 만한 신사업 발굴 니즈가 충분히 있지만, 여러 변수가 많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는 발언으로 해석된다.
실제 모바일·반도체·전장 등 다양한 사업 인수 가능성이 제기돼왔으나 속도는 나고 있지 않는 것으로 파악된다.
올해 초 삼성이 독일 콘티넨탈 전장사업의 부분 인수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이 회사의 ADAS(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 차랑용 디스플레이 등을 인수하게 되다면 전장 사업 자회사인 하만과의 시너지가 예상된다는 시각이 많았다.
KB증권은 "삼성이 콘티넨탈 ADAS 사업부를 인수한다면 인포테인먼트 중심의 전장 사업이 고성능 컴퓨팅 칩 분야로 확장하고, 엑시노스 오토를 비롯한 커스터마이징된 맞춤형 오토 칩 생산 확대가 가능해 향후 삼성 파운드리 사업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진단했다.
아일랜드의 존슨콘트롤즈 인터내셔널의 냉난방공조(HVAC) 사업부 인수 가능성도 제기됐다. 삼성이 조 단위 규모의 인수전에 뛰어들어 공조 사업에 본격적으로 드라이브를 걸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그러나 인수전 최종 승자는 독일 보쉬에게로 돌아갔다. 삼성은 미국 레녹스와의 합작법인 형태로 개별 공조 시장을 공략하겠다고 한 상태다.
하반기에도 노키아, 인텔의 FPGA(프로그래머블 반도체)업체 알테라 등이 물망에 올라와 있지만,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
지난 9월 블룸버그는 소식통을 인용해 삼성이 노키아의 모바일 네트워크 자산 일부를 인수하는 데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시장 장악력 확대가 절실한 삼성으로서는 노키아 사업부를 손에 쥐게 된다면 에릭슨을 누르고 단숨에 2위로 올라서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시장조사기관 옴디아에 따르면 작년 세계 통신장비(소·대형 기지국 등) 시장에서 1위는 화웨이로 31.3%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뒤를 이어 스웨덴 에릭슨(24.3%)이 2위를, 노키아(19.5%)가 3위다. 삼성은 6.1%로 5위에 머무르는 상황이다. 그나마도 전년 대비 1.6%p 축소된 수치다.
삼성전자는 최근 6세대(6G) 기술을 비롯해 차세대 통신 사업에도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삼성이 유럽을 중심으로 글로벌 5G 시장 장악력을 선제적으로 키운 뒤 이를 발판으로 6G 초격차 리더십을 마련하는 그림을 예상해볼 수 있다. 다만 아직까지는 '신중 모드'로 파악된다.
FPGA업체 알테라도 삼성이 인수할 경우 파운드리, 네트워크, 전장 등에서의 시너지가 적지 않다. 다만 약 10년 전인 2015년 당시 알테라 인수금액이 167억 달러(22조원)였던터라, M&A에 나서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AMD, 마벨 테크놀로지 등 강력한 인수 경쟁자가 있다는 것도 부담이다.
그렇다고 삼성이 손을 놓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미국 DNA 분석 장비 기업 '엘리먼트 바이오사이언스'의 2조7700만 달러 규모의 '시리즈 D' 투자에 참여하고 지식 그래프(Knowledge Graph) 기술을 보유한 영국 스타트업 ‘옥스퍼드 시멘틱 테크놀로지스 인수 계약을 체결했다.
또한 산부인과 초음파 진단 리포팅 기술을 갖춘 프랑스 AI 개발 스타트업 '소니오' 인수에도 나섰다. 냉난방공조 사업을 위해서는 미국 레녹스와 합작법인을 설립하기로 한 상태다. 바이오, 가전, 신사업 등에 꾸준히 투자해온 것은 고무적이나, 투자의 정도와 규모를 감안하면 하만급에 견줄 만한 곳은 나오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반도체 등 주력 사업 위기론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M&A에만 집중하기 어려워졌다. 전영현 DS부문장(부회장)이 지난 8일 3분기 잠정 실적 발표 이후 근원경쟁력 회복, 조직 문화 개선 등이 담긴 반성문을 공개한 것이 대표적이다.
반도체 의존도가 적지 않은 삼성으로서는 HBM(고대역폭메모리) 등 AI 반도체를 안정궤도에 올리는 동시에 적자가 지속되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에서도 역량을 회복하는 데 우선 집중할 것으로 예상된다.
기술 경쟁력 회복과 조직 문화 쇄신을 약속한 만큼 이를 이행하기 위한 그룹 내 인사가 보다 앞당겨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흔들리는 조직 전열을 가다듬고 내년도 목표 달성을 앞당기기 위해서라도 예년 보다 이른 11월 인사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조직재정비 기간에는 M&A와 같은 파급력이 큰 결단을 내리기 어렵다. 모든 결정이 완료되고 양사 협약체결식만 앞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연초까지는 '대기 모드'가 되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영업이익 수준을 넘어서는 반도체 시설 투자가 이어지고 있는 만큼 사업 정상화까지는 반도체 및 차세대 기술 투자에 주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과거 반도체 설비투자 규모는 2020년 32조9000억원, 2021년 43조6000억원, 2022년 47조9000억원이며 이 기간 연간 영업이익(연결 기준)이 35조9939억원, 51조6339억원, 43조3766억원이었음을 감안하면 벌어들인만큼 투자하기에도 빡빡하다.
물론 초일류 삼성 도약을 위해 신사업, M&A, 지배구조 개선 등이 꾸준히 지적돼온 터라 보다 긴 호흡으로 접근할 것으로 보인다. 상황이 녹록지 않아도, 시장 잠재력 및 사업간 시너지가 확실시 되는 사업에 대해서는 유연하게 접근할 것이라는 기대다.
인수 대상은 디지털헬스, 전장, 로봇, AI, XR(확장현실) 등이 꼽힌다. 지금까지 삼성은 국가 경쟁력으로 부각될만한 신성장 산업에는 지속적으로 투자를 해온만큼 이 영역 투자를 늘릴 가능성이 있다.
앞서 삼성은 올해 CES와 IFA에서 AI 컴패니언(동반자) 로봇 '볼리'를 공개하며 삼성의 자체 생성형 AI 기술을 과시한 바 있다.
6G(6세대 이동통신)에도 속도를 낼 전망이다. 6G는 AI를 내재화해 더 높은 에너지 효율과 더 넓은 네트워크 범위를 제공하며 ▲AI ▲자율주행차 ▲로봇 ▲확장현실(XR) 등 첨단 기술을 일상생활에서 구현할 수 있게 하는 핵심 기반기술이다. 기술 주도권 확보를 위한 선제 투자가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