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만 돌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 안중근 장군. 그의 이야기는 드라마, 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만들어져왔다. 모두가 알고 있는 여정과 결말을 다시 꺼내들어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하얼빈'은 인간 안중근의 두려움, 고뇌 등에 카메라를 가져가 생명력을 부여했다. 그리고 관객들은 응답했다. '하얼빈'은 개봉 9일째 300만 관객을 돌파하며 박스오피스 정상을 수성 중이다.
영화는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함으로 관객들을 1909년으로 데려간다. 거사라는 단어가 주는 단호함 뒤에는 인간으로서 두려움과 동지를 향한 의심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의심이 때로는 비수를 만들고, 결단이 또 다른 희생을 불러온다. 그런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114분이 지나있다.
안중근을 연기한 현빈은 당초 이 제안을 세 번 거절했다. 안중근이라는 역사 속 인물이 가진 존재감이 커 부담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우민호 감독이 포기하지 않았다.
"안중근 장군이 가진 상징성이 커 제가 감당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제가 세 차례 거절하는 동안 우민호 감독님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제안하셨어요. 그런데 이 때 시나리오를 한 번도 똑같은 걸 주신 적이 없어요. 그때마다 대본이 어딘가 달라져 있었죠. 감독님 스타일이 그래요. 신이 추가되든 빠지든 그런 것들을 통해 퀄리티를 계속 높이려고 노력하세요. 시나리오를 계속 보다가 어느 순간 저도 궁금증이 생겼고 감독님의 전작을 좋아하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안중근 장군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배우로 살면서 또 올까 싶더라고요. 상징적인 인물을 해보는 것도 영광이고 기회다 싶어서 결심했습니다."
현빈표 안중근은 어둡고 감정을 절제하는 인물이다. 출연을 결정한 이상, 허투루 하고 싶지 않았다. 안중근의 자료를 꼼꼼하게 살피며 어떤 모습을 보여줘야 할지 고민을 거듭했다.
"세세한 건 잘 몰랐어요. 자료 보면서 어렸을 때부터 일대기나 어떻게 자라오시고 어떤 생각으로 행동을 하셨는지 알게 됐죠.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거사, 치른 이유, 우리가 알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 영화적으로 만들 수 있는 이 과정들을 보여주는 것이거든요. 자료에 남아있는 빈 공간들을 찾으려고 노력했어요. 무슨 생각으로, 어떤 이유로 하셨을까 물론 상상하는 과정들의 반복이었죠."
그렇게 찾은 '빈 공간'은 역시나 '인간 안중근'이었다.
"처음 접근하기 시작한 건 독립투사로서의 모습, 실행하기까지 독립군으로서 활약할 때 인간적으로 고민과 과절이 없었을까 싶었죠. 참모 중장 아래 선택과 결정에 대해, 옆에 있던 동료들 희생을 봤을 때, 동지들에 대한 죄책감, 미안함 같은 게 인간이라면 분명히 있을 텐데 말이죠. 그런데 저는 이런 것에 대해 보거나 들은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 지점부터 시작해 나갔어요."
안중근이 옷깃을 여미고 홀로 홉스골 호수 위를 걸어가는 장면은 '하얼빈'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다. 이 장면을 찍을 때 현빈 역시 고독했고, 외로웠고, 두려운 감정들을 느꼈다.
"호수는 제가 듣고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어요. 날씨도 너무 추웠고 가는 길이 험난했어요. 공항에서 내려서 16시간을 차를 타고 갔어요. 강에 혼자 올라가 한복판에 서 있으니 공포감이 들더라고요. 호수가 1m 이상 얼어있지만 그 안에서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고 있어서 희한한 소리가 나요. 저녁에 들으니 저는 약간 무섭기까지 했어요. 저희 음악 안에 그 사운드가 녹아져 있어요. 혼자 그 공간에 올라가서 촬영하는데 약간 무섭고 끝이 어딘지 모르겠고 춥고, 외롭고, 고독하고요.. 이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어요. 드론을 날려서 촬영했는데 날씨가 워낙 추워서 오래 촬영을 못했어요. 몇 시간 대기해서 몇 분 찍고 이러는 과정을 계속해서 나온 장면이었어요."
이 영화는 단순히 사건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제작진은 안중근 장군과 독립군의 여정을 진심으로 담아내기 위해 각별히 노력했다. 로케이션은 당시 독립군들이 실제로 지나갔을 법한 풍경과 환경을 찾아 선정했고, 의상과 소품 역시 철저히 고증을 거쳤다. 특히, 자연 풍광이 독립군들의 험난한 여정을 상징적으로 담아낼 수 있도록 모든 촬영 과정을 신중히 계획했다. 우민호 감독은 이러한 준비 과정에서 영화적 편리함을 철저히 배제했다. 블루 스크린과 같은 첨단 기술을 최소화하며, 직접 발로 뛰어 만들어낸 현실감 있는 장면들로 관객에게 당시의 감정을 생생히 전달하고자 했다. 현빈은 이 같은 제작 과정과 우민호 감독의 판단에 배우로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이번 영화는 유독 로케이션이나 시대를 떠나 의상, 소품에 힘을 많이 받았어요. 세트, 로케이션이 주는 힘 때문에 독립군들의 여정을 담을 수 있는 풍광이 들어가서, 다른 때보다 영감을 많이 받았어요. 안중근 장군의 이야기를 하면서 업적이나 존재감에 누가 되지 않게끔, 진심을 다해 임했습니다. 감독님은 처음에 이 영화 고사 출사표 던지실 때 '이분들의 고난의 길, 역경을 딛고 해주신 이 상황까지 이 표현을 절대 쉽게 찍을 수 없다. 블루 스크린 앞에서 촬영할 수 없으니 각오를 하고 촬영 장에 오세요'라고요. 저희 영화는 그렇게 시작됐어요. 영화 자체가 시원한 한방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거사 치르고 나서도 35년 후에야 나라를 되찾았잖아요. 이 영화는 독립군들의 여정에 대한 이야기인 거죠. 그 목표를 가지고 묵묵히 걸어나갔어요."
모든 장면에서 애를 썼지만 가장 신경을 써 촬영한 건 최재형(유재명 분)에게 웅크려 앉아 자신의 진심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퇴로를 마련해 두지 않은 채,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정한 안중근의 결정 뒤 고뇌를 표현했다. 현빈은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내며 이 장면을 완성했다.
"안중근 장군의 자료들을 봤을 때 눈물을 흘리거나 움츠러들거나 하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게 굉장히 큰 감정이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래서 그 신 준비할 때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원래 세트장에 들어갔을 땐 의자가 놓여 있었어요. 최재형 선생이 같이 서 계시다 침대 쪽으로 오고 저는 의자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있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건의를 드려서 의자를 뺐어요. 또 모퉁이에 빛이 없더라고요. 거기에 쭈구려 앉아있으면 어떨까 싶었죠. 늘 앞장서서 진두지휘하고 선택과 결정하는 위치에 있지만 어딘가에 숨고 싶기도 한 그런 감정들을 표현해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감독님께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받아들여주셨어요."
현빈은 인터뷰 내내 '안중근 장군'이라는 호칭을 썼다. 군인으로서 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노력한 안중근의 숭고한 정신과 희생에 깊은 존경을 담은 태도였다.
"군인으로서 이 모든 걸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자료에 군사재판을 받고 싶다고 하셨고요. 본인의 개인적인 상황이 아닌, 군인 신분으로서 진행하셨을 것 같아요. 이후에 벌어질 일들은 본인의 선택과 결정에 같이 노력했던 희생으로 이어졌잖아요. 그러면서 많은 괴로움, 고통, 고뇌, 미안함 등 여러 가지가 인간으로서 작용했을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을 다른 이면에서 영화적으로 보여드리려 한 거죠. 인간으로서의 안중근 장군은 과연 두려움이 없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발 한발 나가야 하는, 그게 사사로운 이유가 아닌, 주권 회복을 위한 거잖아요. 우리 영화는 애초에 그냥 끝이 아닌, 시작과 밑거름의 이야기입니다."
사형대에 오르는 장면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을 하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대사 없이 눈빛과 호흡으로 마지막을 보여줘야 하는 일은 역시 쉽지 않았다.
"실제 자료를 보니 사형 집행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럼에도 한 사람이고 인간이기 때문에 한편으로 그때 생각보다 세트장 안에 있는 처형대가 높았어요. 올라갈 때마다 긴장감이 들더라고요. 한 인간으로서 두려움이 존재하고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미안함도 들었어요. 동지들을 혼자 없어지는 것 같은, 다 떠넘기고 나만 이 험난한 과정에서 없어지는 거니까요. 수많은 동지들이 이걸 위해 또 애써야 하고 힘내야 하는 것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요. 캐릭터를 벗어나서 울컥하더라고요."
OTT 플랫폼의 성장과 함께 많은 관객들이 작은 화면으로 영화를 소비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 이로 인해 극장 관객 수는 점차 감소하고 있으며, 한국 영화 시장 역시 그 여파를 크게 겪고 있다. 특히 팬데믹 이후 관객들은 극장을 찾는 대신, 집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편리함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하지만, '하얼빈' 제작진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도 극장이 가진 특별함을 다시금 강조하고자 했다. 영화의 스케일과 몰입감을 관객에게 최대치로 전달하기 위해, 음악, 영상, 그리고 카메라 움직임까지 모든 요소를 큰 화면에서 최적화된 방식으로 설계했다. 이러한 노력은 관객들에게 극장이라는 공간이 단순한 영화 관람의 장소를 넘어서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OTT가 강세고 휴대폰, 아이패드, 노트북 등 작은 화면으로 영상을 보는 일들이 많아졌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화를 보셔야 하는 이유를 찾으려 노력했어요. 그래서 음악, 영상 등 큰 화면에서 봤을 때 느끼는 것들에 신경 썼죠. 한국영화 시장이 여러 가지 이유로 좋지 않은데 극장에서 '하얼빈'은 꼭 보셨으면 해요. 감히 극장에 최적화된 촬영을 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