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학 칼럼>서당에 보내는 선물 ´술병과 회초리´에 담긴 뜻
필자(筆者)는 요즈음 우리 사회의 심각한 교육적 혼돈 하나를 경험하고 있다. 교편(敎鞭)이라는, 교사에게 부여된 엄중한 임무를 나타내는 언어가 주는 혼돈이다. 우리 교사들은 가르침에 있어 학생을 향한 정열, 곧 채찍(鞭)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옛날 서당 풍경 하나를 소개해 본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겨울이 되면, 겨울 농한기를 맞아 서당이 문을 연다. 그러면 서당에 아이들을 보내는 부모들은 아이들 손에 훈장님께 보내는 선물을 들려 보내는데, 그것은 곧 술병과 회초리였다.
술병은 가르치는 훈장님의 노고를 위해, 회초리는 잘못된 아이들을 바로잡는데 써달라는 의미였다. 술병과 회초리, 얼마나 의미심장한 의미를 담은 선물인가. 그러나 우리는 지금 술병은커녕 회초리마저 폭력으로 치부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아마 한번이라도 남을 가르쳐본 사람들은 때론 학생들을 통솔하거나 지도하기 위해 기합이나 회초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교사가 학생들을 훈육하는 성스런 도구로 인정되는 게 아니라, 가르침이 폭력으로 인정되는 우울한 시대에서 우리 교사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별나고 별난 수많은 아이들, 그것도 사춘기적 반항의 시기를 맞는 아이들. 저마다 가정교육이 틀리고 생각과 가치관이 다른 아이들을 일사불란하게 하나로 가르치는 것은 얼마나 고되고 어려운 일일 것인가? 아마도 학부모들은 이 사정을 모를 것이라 짐작한다.
수업시간에 자는 놈, 장난치는 놈. 숙제 안하는 놈부터 오만잡가지 일들이 발생하는 교단에서 학부모와 법은 교사들에게 회초리를 앗아간 것이다. 체벌하면 즉시 돌아오는 것은 욕이요, 교사도 폭력혐의로 처벌하는 현 사회에서 누가 소신을 가지고 학생을 지도할 것인가?
공자님 이야기다. 공자님이 6국을 순행할 때, 한번은 길가에서 똥을 싸는 놈을 보았다. 그걸 본 공자님은 제자를 시켜 ‘똥 싸는 놈’을 잡아오게 하였다. 그리곤 인간의 윤리를 들어 엄청나게 꾸짖는 것이었다.
“사람이 개나 소, 까마귀 같은 금수(禽獸)가 아닌 이상, 어찌 가리고 못 가릴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가? 길가에 똥을 싸다니, 너는 사람인가, 짐승인가?”
그러자, 똥 산 사내는 머리를 두 손으로 싸매고 도망쳤다 한다. 그러고 나서 한참을 가다보니, 이번에는 아예 길 가운데다 똥을 싸는 놈을 만났다.
그러자 공자님은 제자들더러 “지금 길 가운데 똥 싸는 놈을 피해서 가자”고 했다 한다. 제자들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스승님, 어찌 길 가운데 똥을 싸는 자는 피해갑니까? 저놈은 길가에다 싼 자 보다 더 나쁜 놈 아닙니까?”
공자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 자는 아예 일말의 양심도 없는 자이다. 길가에 싼 자는 그래도 한가닥 양심이라도 있으니 가르치면 되겠지만, 아예 길 가운데서 싸는 자는 그것조차도 없는 자이니, 어찌 가르칠 수 있겠는가?”
교육은 바로 이런 것이다. 학생 중에는 아예 대놓고 나쁜 짓을 하는 아이들도 있다. 그런데도 사회는 교사에게 회초리를 앗아가고 있다. 성인(聖人)인 공자님도 가르침을 포기한 사람도 있는데, 하물며 평범한 우리 교사들은 어찌 할 것인가?
“규율을 견디는 아이는 받아서 가르치고 참을성이 없는 아이는 제자로 받지 말아야 한다. 집안 살림을 감당할 수 있는 자식은 결혼을 시켜주고 바람기가 있는 여자는 아내로 삼지 말아야 한다. ”
주역의 산수몽(교육)편에 나오는 말이다.
참으로 귀담아 들을 말이다. 우리는 역사를 살다간 위대한 스승님들의 뜻을 제대로 받들어, 훌륭한 인재를 기르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부디 선생님을 귀하게 여기는 풍토를 조성해야 한다. 가르치는 수고는 이 세상 만 가지 일보다 더 소중한 일이기 때문이다.
내 가문과 내 집안이 세상에 빛을 내는 일은, 바로 내 자식들이 공부 잘하고, 얼마나 훌륭한 인품을 지닌 인간으로 성장해 주느냐에 달린 일이다.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해주는 분이 학교 선생님들이다. 집안의 흥망을 좌우하는 교육 문제에, 선생님의 회초리조차도 허용하지 못하면서 무엇을 더 가르쳐 달라는 이야기인가?
부디 대통령께선 공자의 일화를 귀담아 새겨들으셔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