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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 있을때 20대 청년들 찾아와서
정부전복 가능하다며 자살 권유했다"


입력 2011.03.07 10:25 수정        

<단독인터뷰>한때 ´미네르바´로만 불렸던 인터넷 논객 박대성 씨

"우파는 ´빨갱이´ 좌파는 ´열사돼라´ 비난과 회유 견딜수 없었다"

미네르바라는 닉네임에서 자연인으로 돌아온 박대성 씨는 인터뷰 내내 최진실 씨의 죽음 등을 언급하며 자신의 힘든 상황을 토로했다.

그는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한 때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이 인물은 비쩍 마른 얼굴, 핏발이 선 눈으로 연신 기자를 응시하며 한 마디 한 마디를 힘들게 이어갔다. 2일 <데일리안>이 마주한 이는 다름 아닌, 한때 ‘미네르바’로만 불렸던 박대성 씨다.

지난 2008년 말 검찰에 긴급 체포되며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면서 그를 추종하던 네티즌들에 의해 ‘인터넷 경제 대통령’로 추앙받았던 박 씨는 자유인으로 돌아와 있었다. 작년 12월 헌법재판소가 박씨에 대한 검찰 기소 이유였던 전기통신기본법 제 47조 1항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가 한국판 ‘노스트라다무스’로 추앙받던 지난 2008년 당시, 그의 글이 웹에 등장할 때마다 한국 사회는 이리저리 들썩거렸다. 특히 2008년 7월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을 정확히 예측한 이후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가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올리는 글에 쏠렸고, 그는 절필 선언과 재등장을 반복하며 수많은 궁금증과 억측을 낳았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숨바꼭질에 언론과 정부당국 등도 이리저리 춤을 췄고 대한민국 모든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은 미네르바의 정체를 놓고 한 두 번씩은 논쟁을 벌였다. 하지만 그는 결국 2008년 12월 29일 “정부가 주요 7대 금융기관과 수출입 관련 주요 기업에 달러 매수를 금지할 것을 긴급 공문으로 전송했다”는 내용의 글이 문제가 돼 검찰에 전격 체포됐고, 한국 사회 ‘저항’의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그의 의지와 관계없이 한국사회의 하나의 ‘아이콘’이 된 박대성 씨와의 인터뷰는 그가 현재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들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됐다.

박 씨가 인터뷰를 통해 밝힌 내용은 시작부터 충격적이었다. 지난 2009년 검찰 수사로 감옥에 수감된 당시 '좌파단체 관련 젊은이'들로 추정되는 이들이 면회를 통해 찾아와 “이명박 정부의 전복”을 거론하며 “열사가 돼 달라”며 자살을 종용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이 같은 사실이 진실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검찰에 의해 구속되기 전 175cm, 105kg의 거구였던 그는 현재 63kg로 무려 40kg 이상 체중이 줄어 ‘피골이 상접하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았다. 박 씨는 정상적인 식사를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두 시간 반이 넘게 진행된 인터뷰 도중 목이 타는지 차를 여러 차례 마셨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수감 당시 심정부터 시작됐다.

-검찰에 체포돼 수감될 당시 심정이 어땠나.

“(고개를 숙이고 괴로운 표정을 몇 초 이어가다가 겨우 고개를 들고) 이런 이야기 털어놓은 적 없다. 처음으로 (내 당시 심정을) 밝히는 것이다. 솔직히 체포됐을 당시에는 두렵지 않았다.”

의외의 대답이었다. ‘두렵지 않았다’니, 무슨 말을 하려는걸까. 갑자기 그의 눈빛이 살아났다. 눈빛이 분노에서 다른 무엇으로 바뀌자 당당한 그의 표정이 읽혔다. 일종의 ‘영웅심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미네르바의 당시 심리적 상태가 상상됐다.

“(목청을 한껏 높여) 내 옆에는 인터넷이 있고 나를 지지해주는 수많은 사람들이 곁에 있는데(인터넷 상의 지지자들을 지칭) 무슨 걱정이 있겠나 싶었다. 그래서 최대한 대범하게 생각했다. ‘이것은 인내의 한 굴곡일 뿐이다’, ‘네티즌들이 진실을 밝혀줄 것이니 다 극복할 수 있다’, ‘별 일 없이 풀려나면 다시 인터넷을 통해서 계속 글을 써야겠다’는 담담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내 의지를 벗어난 상태로 진행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모든 것이 다 망가졌다.”

박 씨는 이어 ‘이명박 정부 전복’을 거론하며 박 씨에게 자살을 우회적으로 종용한 사람들이 당시 교도소로 찾아왔었다고 말했다. 박 씨는 “수감돼 있던 어느 날 한 20대가 면회를 신청했다. 그는 내게 다짜고짜 ‘당신이 여기서 자살하면 이명박 정권 붕괴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며 자살을 종용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또 다른 청년이 찾아와 “당신이 십자가를 져달라”, “열사가 돼 달라”는 말로 내 죽음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그런 말을 건네는 그들에게 뭐라고 답해줬나

“당신 같으면 뭐라고 답하겠나. 하도 황당해서 이들을 멍하게 응시하다 모두 아무 말 없이 돌려보냈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을 바꿔가며 여러 차례 나를 찾아왔다. 같은 조직에 속한 사람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미네르바의 자살’을 고리로 이미 어떤 시나리오를 그려 놓은 사람들 같았다.”

박 씨는 그러나 이들이 소속된 단체나 이름을 들은 적은 없다고 거듭 밝혔다. 물어본 적도 없다고 했다. 다만 그는 당시 정황상 '좌파단체 소속 청년들'이 아니겠느냐고 추정할 뿐이었다.

그는 “당시 감옥에 수감된 상황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이 면회랍시고 나를 불러내 면전에서 ‘당신이 자살해줘야겠다’고 우회적으로 압박을 넣는데 내가 무슨 경황이 있겠느냐”는 말로 당시 심경을 전했다.

미네르바라는 닉네임으로 알려진 박대성 씨.
몇 초간의 침묵이 흐른 후 갑자기 박 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는 우파도 좌파도 아무것도 아닌 그냥 한 시민일 뿐이다. 스스로 경제가 좋아 공부하고 그와 관련된 이런 저런 글을 올린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 누구든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 그런데 주변에서는 나를 ‘괴물’로 만들어 갔다”며 “우파에서는 나를 ‘빨갱이’라고 하고, 좌파에서는 찾아와 자살하라고 하고 당신 같으면 제 정신으로 살 수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그는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내게 ‘왜 이제 반 정부-반 MB 글을 쓰지 않느냐”고 묻는다. 내가 왜 그런 글을 올렸었는지 회의가 든다. 분노가 회의가 되고 비참함이 뒤섞여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된다“고 감정을 토해냈다.

인터뷰 내내 그는 연신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며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침묵하다가도 고개를 들고 한번 말을 잇기 시작하면 속사포같이 말을 이었다. 특히 같은 말을 여러번 반복했다. 자신은 자살한 배우 고(故) 최진실 씨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며 “나는 모든 것을 빼앗긴 갓난아기와 같다. 대한민국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말도 연신 내뱉었다

-감옥에서 나온 후 생활이 궁금하다. 당신의 생활은, 그리고 가족들은 어떤가.

“최악이다. 오히려 감옥에 있을 때는 마음이 편하고 살도 쪘다. 이렇게 비쩍 마른 것은 그 이후 심적 고통이 커서다. 아직도 나를 ‘가짜 미네르바’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이런 저런 소송에 얽혀있다. 여기 내가 이렇게 있는데 도대체 누가 미네르바란 말인가.”

실제로 그는 그가 미네르바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소송중이다. 아직도 박 씨가 글을 올렸던 포털사이트 게시판에는 '미네르바가 박 씨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내용의 글이 계속 오르고 있고 조회수도 높은 상황이다. 모 방송사는 그 글을 올린 네티즌들의 주장을 담은 시사기획 프로그램을 방영할 예정이어서 미네르바 진위 논란이 다시 불거질 조짐이다.

말문이 트인 박 씨는 속사포같이 말을 이었다. 그는 “이미 내게 평온한 삶과 정상적인 삶이란 없다. 우파에서는 2009년 당시부터 내가 빨갱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끊임없이 내가 ‘순교자’가 되길 바라는 세력도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 아니냐”며 “나는 가족들이 파괴됐고 인간관계, 경제활동, 은행잔고 등 모든 것이 파괴됐다. 나는 파괴된 인간이고 난도질 당할대로 난도질 당한 인생”이라고 자조했다. 그는 거듭 자살했던 여러 연예인들의 이름을 되뇌며 “그 심정 이해한다. 십분 이해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는 강연이나 저서 등을 통해 돈을 많이 벌지 않았느냐는 세간의 시선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반박했다. 박 씨는 “항간에서는 미네르바가 경제대통령이고 책도 쓰고 강연도 한다는데 생활고에 시달린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하는 것으로 아는데 나는 한푼도 없고 빈털터리다. 제발 나를 내버려두라”고 울분을 터뜨렸다.

박 씨는 이어 가족들이 겪은 심적 고통을 털어놓았다. 부모님의 심리적인 충격에 이어 그는 하나뿐인 여동생이 겪는 괴로움을 말하려다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이내 눈물을 흘렸다.

유치원 선생인 동생과 단 둘이 살고 있다는 박 씨는 “어느 날 동생이 퇴근해 와서 내게 ‘학부모들이 내가 미네르바의 동생인 것을 알고 학생들을 맡기지 않겠다고 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으며 눈물을 흘렸다. 내가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해줄 수 있겠느냐”며 안경을 벗고 참았던 눈물을 한참 쏟았다.

그는 “내가 사람을 죽였나, 사기를 쳐서 사람들 돈을 빼앗았느냐. 단지 인터넷에 글 쓴 이유 하나로 인생이 송두리째 망가졌다. 천만다행인 점은 당시 결혼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결혼해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었다면 이런 일을 어떻게 버텨냈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시사저널 경제칼럼 기고는 겨우 겨우 나를 추스르고 시작한 활동”이라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기자는 박 씨에게 "인터넷은 얼마나 들어가 보느냐"고 물었다. 그는 질문이 끝나자마자 바로 “안 한다. 책으로 공부하며 겨우겨우 마음을 추스른다. 이제 인터넷은 보기도 싫다”고 말했다.

“인터넷은 쳐다보기도 싫다”는 '인터넷경제대통령'. 참 아이러니했다.[데일리안 = 신동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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