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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때 부산서 봉홧불만 제대로 올렸어도...


입력 2013.10.06 10:28 수정 2013.10.07 19:32        최진연 유적전문기자

<최진연의 우리 터, 우리 혼>경상도지역 최전선의 봉홧불 부산 응봉봉수

1592년 4월13일 오후 4시경, 왜선 100여척이 부산포로 침입한다는 긴급 상황이 지역의 봉수군 별장에게 전달됐다. 보고를 접한 책임자는 재빨리 봉홧불을 올리도록 명을 내렸다. 하지만 봉화는 노선 상 북쪽 성화예산봉수로 가야하는데 남쪽 가덕도 천성보봉수로 전해졌다. 당황한 봉군이 반대방향으로 신호를 보내고 말았다. 한양으로 가야 될 횃불은 결국 반대방향에서 사라졌다.

임금께 임진왜란의 발발보고는 4월17일 아침, 부산이 함락 된지 3일후였다. 그나마 경상좌수사 박홍이 이웃봉수로 말을 타고가 알렸기 때문이다. 왜군은 거침없었다. 15일 만에 한양을 점령했다. 봉수는 부산서 한양까지 제대로만 가면 12시간 내로 도착하는데 엄청난 과오를 저질렀다.

고증없이 복원한 응봉봉수ⓒ최진연 기자

뿐만 아니다. 임진왜란 이전부터 봉화불은 시간이 지체되거나 두절되는 일이 많았다. 봉군들의 근무태만과 관리소홀 때문이다. 응봉봉수는 초기대응 미숙으로 임진왜란 때 역사의 상처를 남긴 봉수다.

부산 다대포해수욕장 뒤쪽 아미산(233m)정상에 응봉봉수가 있다. 초기설치는 미상이지만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전국에 봉수가 다니는 다섯 갈래 길 중에서 두 번째의 직봉 출발지로서 상징성이 매우 큰 유적이다. 낙동강하구 일대와 다대포진 해상으로 출몰하는 적선을 감시하면서 서남쪽에서 오는 횃불을 받아 동쪽 석성봉수와 서쪽 성화예산봉수로 전달했다. 응봉봉수는 다대포진 관할로 6명의 별장과 감독관 1명, 100명의 군사가 배치됐다.

조선시대 때부터 다대포는 적의 출몰이 잦았다. 응봉봉수와 함께 군사정보를 주고받는 진영이 설치돼 압록강변의 만포진과 함께 국방의 요충지를 이뤘던 유명한 곳이었다. 세종은 이곳에 수군만호영을 설치했으며, 성종 때는 높이 4m, 둘레 560m의 다대포진을 축성했다. 충무공 이순신도 선봉장에 섰던 곳이다.

응봉봉수의 방호벽ⓒ최진연 기자

하지만 승전보다는 쓰라린 패전의 아픔을 남긴 곳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부산진성을 접수한 뒤 곧바로 서평포와 다대포를 함락시켰다. 이 때 다대포 첨사였던 윤흥신과 동생 흥제가 왜군과 혈전을 벌이다가 전사했다. 현재 다대동 주공아파트 입구에 윤흥신 등을 추모하는 ‘윤공단’이 세워졌다. 특히 30년 전에도 다대포는 1983년 북한 무장공비가 침투, 우리 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현재 봉수는 옛 모습이 사라졌으며, 2010년 1월 횃불을 올리는 연조하나와 방호벽을 설치했지만 복원보다는 고증절차를 무시한 이벤트 성이 짙다.

봉수에서 본 몰운대ⓒ최진연 기자

부산에는 경관이 뛰어난 9개의 대(臺)가 있는데, 그중 가장 서쪽에 있는 것이 몰운대다. 다대포해수욕장과 연결돼 있으며 울창한 소나무 숲길이 멋진 곳이다. 특히 붉은 융단을 깔아놓은 듯한 낙조를 보기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봉수대에서 내려다보면 몰운대와 남쪽 가덕도, 을숙도까지 한눈에 조망된다. 봉수군이 떠나 자리는 이제 관광자원으로만 남았다. 봉수대 가는 길은 다대중학교 옆으로 임도가 개설되어 있어 8부 능선까지 자동차가 진입할 수 있다. 그곳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소요된다.

최진연 기자 (cnnpho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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