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식의 문화 꼬기>원더우먼 아니면 착한 사람 증후군 못벗어나는 현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교사는 아이들에게 부드럽고 자애롭다. 현실을 강조하기 보다 이상적인 세상을 말한다. 세상을 부정적으로 그리기 보다는 긍정적으로 말한다. 경쟁과 투쟁보다는 협력과 화합을 강조하여야 한다. 초등학교 여교사라면 더욱 이에 부합한다.
하지만 드라마 '여왕의 교실'에서 교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마 교사(고현장)의 표정과 태도는 차갑고 말이 없으며 말이 있어도 딱딱하기만 하다. 마교사는 이상적인 세상을 말하기 보다는 현실이 어떤지 적나라하게 드러내는데 집중한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여주기 보다는 부정적인 모습을 강조한다. 협력과 화합보다는 투쟁과 경쟁을 장려한다.
직장인들은 해고나 승진을 항상 염두해야 하기 때문에 정당하지 못한 요구나 규정에 없는 업무도 수용할 수밖에 없다. 속으로야 불만감이 있어도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항상 전전긍긍한다. 드라마 '직장의 신'에서 미스 김(김혜수)은 보통 직원이 생각하는 언행에서 한 참 벗어난다.
역시 언제나 표정은 변화가 없고 말은 사무적으로 딱딱하기만 하다. 비록 비정규직이라는 신분이지만, 오히려 거꾸로 비정규직에 한정된 일만 철저하게 고수한다. 배려나 동정을 철저히 배격한다. 이는 동료들에게도 비용을 청구하는데서 극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원리와 규정에 철저하게 언행을 맞출 뿐이다.
가사 도우미ㅡ가정부는 남의 가사 일을 도와주는 사람이기에 좀 더 친절한 언행을 갖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으면 고용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자신의 주관을 자제하고 시키는 일을 해야 할 때도 있다.
드라마 '수상한 가정부'에는 가정부의 이미지와 다른 캐릭터 박복녀(최지우)가 등장한다. 역시 표정이 없고, 말은 딱딱하기만 하다. 어떤 명령이라도 수행하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것에 그칠 뿐 자신의 주관에 개입하는 일은 거절한다. 예컨대, 웃어보라는 명령을 절대 거부한다.
마 교사나 미스 김, 박복녀는 하나같이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아 호기심을 자극한다. 도대체 왜 저들은 저렇게 하는 것일까.
그들을 보면 사람은 선험적인 존재가 아니라 경험적인 존재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세 사람이 보통과 다른 언행을 보이는 것은 모두 자기의 경험에 따른 선택이었다.
이상적인 교육 실천을 위하는 착한 교사가 현실적으로 학생은 물론 교사 자신에게도 결코 좋지 않다는 점을 마 교사는 인식하게 되었다. 때로는 차갑고 냉철한 교사라는 비판에 직면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학생 개개인의 실체적인 삶을 영위하게 만들려고 했다. 미스 김은 승진과 고용을 위해 비정규직의 한계를 넘어 동료애와 희생 배려를 투여했지만 결국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친구 동료도 잃고 말았다.
박복녀는 자신 때문에 딸과 남편이 목숨을 잃어버린 것이란 생각에 얼굴에서 웃음기 자체를 사라지게 했다. 일종의 자기 형벌적인 조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자신이 일하고 있는 집안의 가족 일에 대개 가치 판단이나 개입을 하지 않으려 한다. 무엇보다 행동을 통해 각자 구성원들이 스스로 판단하기를 바란다. 누군가의 기대를 바라거나 판단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자기결정권에 따라 실천하기를 바란다.
이 세 명의 캐릭터가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뜻은 무엇일까?
우리가 흔히 당연하고 선하며 바람직하게 여기는 언행이 그와는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상황은 극단적이지만, 메시지는 이런 맥락 안에 있다. 결과만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게도 좋지 않을 수 있으니 성찰이 필요한 일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신비롭거나 미스터리한 능력이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지적 육체적인 능력들을 가지고 있는 원더우먼들이다. 그런 원더우먼들이 되지 않고서야 우리를 괴롭히는 착한 사람 증후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실에서 착한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남아 있는 것일까. 착하다는 개념은 결국 상대적일 수밖에 없지 않는가. 우리는 정말 착하게 살고 있을까. 착하게 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너무도 쉽게 자신의 욕망을 합리화 하고 다른 이들에 대한 위해를 가할 수 있다.
글/김헌식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