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청원 '존재의 이유' 말한마디로 보이다
<칼럼>끝도 없는 추악한 정치싸움 중재할 원로 그리워
‘Good morning, Pigeon sir !'
어느 늙은 노파에게 모두들 그렇게 인사한다.
영화 ‘굿모닝 비둘기 선생’에 나오는 장면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미국의 어느 소도시의 이야기다. 주인공인 노파는 처녀다. 팔십 평생을 시집도 가지 않고 혼자 늙었다. 도시의 사람들은 그녀에게 공손하다.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다. 진실로 존경한다.
그녀는 도시 구석구석을 다니며 큰소리를 친다. 어느 집 베란다 앞에서는 화초에 물을 주라며 나무란다. 집주인은 반갑게 나와 감사하다며 안부를 묻는다.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녀가 횡단보도에 서면 차들이 와서 멈춘다. 신호는 아무 상관이 없다. 노파가 건너갈 때까지 웃으며 기다린다. 경찰서장에게 죄수를 내어달라고도 한다. 자신이 가르치겠다며 말이다. 경찰서장은 순순히 말을 듣는다.
법과 질서를 넘어서는 카리스마를 가졌다. 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이다. 한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어른으로 존경을 받았다. 법과 제도와 질서를 넘어서는 카리스마를 가진 것이다. 도시의 구심점이자 상징이 된 것이다.
꿈같은 이야기다. 존재의 가치로 도시는 평화롭게 유지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마을 어른은 그러했다. 법을 따지기 전에, 마을 어른에게 먼저 상의를 하는 게 미덕이었다. 그런 시절이 우리에게도 분명히 있었다.
이제는 먼 얘기가 된 듯하다. 복잡해진 세상 탓이다. 각박해졌기 때문이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세상소리가 있다. 아날로그적 정서로 이해하면 웃음이 나온다. 무엇이든 법으로 해결하는 까칠함 보다야 인간적이다 싶어서다. 괘변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정쟁이 심각하다. 언제 해결될지도 모른다. 햇살이 나왔다 싶으면 이내 먹구름이 낀다. 대한민국의 정치가 그렇다. 야당의 초선 의원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막말을 했다. 같은 최고의원이 거들었다. 청와대는 격분하는 모습을 보였다. 새누리당은 이에 질세라 의원제명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끝도 없는 싸움들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 와중에 서청원 의원이 등장했다. 새누리당 친박의원의 실질적 좌장이다. 10월 보선 당시만 해도 서 의원의 등장은 갑론을박이 심했다. 올드보이의 귀환이라는 비판을 비롯해 정치적 득실과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갈렸다.
그러나 서 의원의 등장에 기대하는 바는 분명했다. 당청간의 가교역할이었다. 정치적 경험과 노련함으로 정치권의 조정자가 되기를 바라는 여론이 있었다. 서 의원의 등장이 정당화 될 수 있었던 명분이었다. 그런 그가 최근 정국대치 상황에 입을 열었다. 여당과 야당에 쓴소리를 했다. 여당에는 따뜻한 포용을, 야당에는 정치적 도의를 말했다.
서 의원의 이 같은 한 마디는 청량제 같은 가치가 있다. 갈증에 목마른 상황에서 말이다. 정치적 함의는 계산할 필요없다. 또한 서 의원의 속셈도 관심없다. 당권을 위한 행보니 대통령의 메신저니 하는 것들도 잘 모르겠다.
다만 살벌해진 정치권에 필요한 말을 던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정치의 본질은 대결이 아니다. 협의와 조정이며 타협이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지 1년이다. 정부 초기라는 점도 있다. 그러나 너무 심하게 싸운다. 한치의 양보도 없고 배려도 없다. 틈만 보이면 공격이다. 이래서는 나라꼴이 안된다. 정치가 실종되면 국정도 실종이다.
서 의원은 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살벌한 정치판에서 보완적 완충역할을 해야 한다. 싸움을 말리는 조정자로서, 원로로서 쓴소리를 마다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서 의원이 할 일이다. 정치적 속셈만을 따진다면 일개 국회의원에 불과하다. 그렇치않다면 경험과 노련함을 갖춘 국가의 원로가 되는 것이다.
서청원 의원이 영화 ‘굿모닝 비둘기 선생’의 주인공과 같다는 말이 아니다. 날로 척박해지는 정치권이다. ‘비둘기 선생’과도 같은 구심점이 그리워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는 왜 존경받는 원로가 없나”하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노련한 7선 국회의원, 서청원 의원의 한 마디가 너무나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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