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터리 국사교육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굿소사이어티 서평>국정체제 폐지 위해 수십년 발로 뛴 좌파들 실상
“이번 교학사 역사교과서 채택을 보면서 한국사회의 좌파가 얼마나 깊게 뿌리박고 있으며 이들이 얼마나 지독한가를 잘 알 수 있었다.” 전체주의적 폭력이라고밖에 설명할 수밖에 없는 교학사 교과서 퇴출 운동에 경악한 한 언론광고학 전공 교수가 털어놓은 소감이다. “특히 정치권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영역에 이들이 지난 20여 년 간 얼마나 치밀하게 자신들의 진지를 구축해놓았는가를 잘 보았을 것”이라고 그는 지적했는데, 역사교과서 문제는 결국 좌파가 쥐고 있는 문화권력, 지식권력의 문제로 귀결된다.
전국 2300여 학교 중 이 교과서를 선택한 곳은 단 한 곳도 없다는 사실(이 글은 부성고가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하기 전에 쓰인 것임. 편집자 주)이 너무도 무시무시하고 두려워 거의 초현실적인 느낌마저 준다. 여기에 1000만 관객을 넘겼다는 영화 '변호인'의 등장도 전방위로 작동하는 문화권력, 지식권력의 위세를 재확인해준다. 이 사회에 책임 있는 주류, 정상적 정부 기능이 과연 작동하는가 하는 걱정을 반복하지 않을 수 없는데 출판계도 그 모양이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포함해 '한강', '아리랑' 등 대하소설 3부작의 총판매 부수가 1000만이라는데, 그가 쓴 엉터리 장편 '정글만리'(3권)는 100만 부를 다시 넘겼다.
영화 '변호인', 소설 '정글만리' 그리고 국사교과서 파동
무인지경인 문화계의 상황에 무력감을 넘어 아찔하지만, 신발 끈을 고쳐 매는 마음으로 신간 '한국사교과서 어떻게 편향되었나'(정경희 지음, 비봉출판사 펴냄)을 읽는다. 이 책은 국사교육의 주도권이 언제부터 정부의 손을 떠나 민중사학 기치를 앞세운 좌파 지식인 그룹이 쥐게 됐는지의 경로를 추적했다. 1980년대 대두한 민중사학이 무엇이며, 민중사학자들의 목표가 무엇인가를, 그리고 민중사학자들이 자신들의 목표를 이룩하기 위해서 어떤 활동을 해 왔는지 구체적으로 밝혀낸다.
목소리의 톤은 차분하다. 건국 이후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 서술에 영향을 미친 여러 가지 서술지침 및 교과서 집필진에 대한 실증적 분석이기 때문이다. 이걸 규명한 단행본으론 처음인데, 정치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른 국사 교과서 문제를 성찰해보기 위한 텍스트로 훌륭하다. 논쟁적 성격의 책은 아니고 외려 학술서에 가깝다. 다소 건조한 듯한 문장도 불필요한 이념 논쟁에 말려드는 걸 피하기 위한 장치로 나쁘지 않다.
그렇다고 애매한 가치중립을 표방하는 건 결코 아니다. 현행 국사교과서의 성격을 "마오쩌둥주의의 영향을 받은 좌파적 민족주의"로 확실하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니 전체적으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친북 반미 성향을 보이는 '정치화된 교과서"(187쪽)라는 게 저자의 움직일 수 없는 판단이다. 이 책을 훑어보며 우선적으로 드는 생각은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국정체제 전환이 생각만큼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란 점이다.
검인정 체제의 부작용을 다스리기 위한 처방으로 가장 훌륭하지만, 단단한 각오 없이 국정체제 전환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대로 "이처럼 이념적 편향성이 심각한 교과서를 통해 국사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걱정스러운 상황이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 뿌리가 매우 깊다"는 판단 때문이다. 설사 어렵게 국정체제로 전환한다 해도 제대로 서술하기에 어려움을 쉽게 피할 수 없다.
학계의 학문적 온축이 없거나 사회적 합의 혹은 정치권의 결단이 받쳐주지 않을 경우 상당히 오랜 동안 진통을 피할 수 없다. 주무부처인 교육당국이 지금처럼 양쪽의 눈치만 보며 복지부동할 경우 상황은 더욱 어렵다. 그런 판단은 국정 체제 폐지 자체가 1970~80년대 이후 진보 좌파들의 집요한 목표였음이 이 책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진보 좌파들은 무엇보다 박정희 정부의 국적 있는 교육이란 슬로건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대신 역사발전의 주체인 민중이 주인이 되는 역사를 서술하여 그걸 본래 주인인 민중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논리를 구사했다.
국정체제 폐지 위해 좌파들은 수 십 년을 발로 뛰었다
국가 교과서 내용도 민중 중심주의로 바뀌어야 하지만, 정부가 역사 서술의 주체가 되면 국가주의로 연결될 위험성이 있으니까 안 된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그들에게 민중이란 무엇일까? 민중은 1980년대 민주화 이후 내내 지식인 사회의 여의주처럼 구사됐다. 그건 구체적으로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의 담지자로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싸워온 변혁의 주체세력"(78쪽)을 지칭한다. 이런 민중사관은 용어 하나 하나에 관철된다. 이를테면 일제강점기라는 용어. 어느 순간 우리 역사교과서들은 일제시대를 일제강점기로 쓰는데, 이건 1987년 6월에 발표된 교과서 집필 5차 준거안에 따른 것이다.
문제는 그게 북한이 만들어낸 용어를 차용한 점이고, 은근한 반미(反美)를 겨냥했다는 점이다. 해방 이전 일제시기는 일제강점기, 이후는 미제강점기로 대별한다. 대표적으로 '조선통사'에 실린 용어인데, 이렇듯 민중사관은 북한의 역사서는 물론 역사해석을 상당부분 수용했다. 저자의 지적이 날카롭다. 5차 준거안 발표는 일부 북한자료에 대한 정부의 개방선언 즉 해금 조치에 한 달 앞선다. 그렇다면 해금 조치에 훨씬 앞서 북한 역사학의 수용이 있었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당시 국사학자) 조동걸을 비롯한 국사학자들이 북한의 조어(造語)인 일제강점기에 대해 제대로 알고 사용했는가의 여부이다. 만일 조동걸 등이 일제강점기가 미제강점기와 짝을 이루는 북한의 조어라는 사실을 알고도 사용했다면, 이는 오늘날 대한민국을 미국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인식하는 북한의 역사해석에 동조하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46쪽)
국정체제 전환이 쉽지 않지만, 전환 이후에도 과연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교과서 서술이 가능할까? 그 과제를 재삼 따져 묻는 것은 민중사학의 뿌리는 1980년대가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민중사학의 바탕에는 맹목적인 민족주의가 깔려있는데, 이게 정말 문제다. 맹목적 민족주의는 민중사학은 물론 북한역사학과 공유하는 것이라는 건 상식인데, 실은 1960년대 박정희 정부도 그 못지 않은 민족주의 정서를 갖고 있었다. 이를테면 1969년 당시 대표적 사학자들인 한우근 이기백 이우성 김용섭 등 4인은 '중고등학교 국사교육개선을 위한 기본방향'이라는 제목의 정책보고서를 만들었다.
북한역사학과 공유하는 맹목적 민족주의 정서
당시 국사학계의 급선무가 식민사관 극복, 민족사관 수립이었다. 그러다 보니 역사의 주체를 국민 또는 국가가 아니라 민족으로 설정해 야했다. 민중적 관점, 민족주의적 입장은 이때 이미 만들어졌다. 그때 만들어진 시안 작성의 기본 원칙 다섯 가지엔 "국사의 전체 기간을 통하여 민족 주체성을 살린다." "각 시대에 있어서의 민중의 활동과 참여를 부각시킨다"는 항목이 들어가 있다. 당시로선 최선이었을 것이다. 박정희 정부는 물론 사회적 요구였고, 당시 학계의 응답 역시 나쁜 게 아니었다.
다만 민중사학을 한다는 이들이 이걸 악용했던 게 문제이다. 그때의 민족사관이 끝내 자폐적 민족주의로 흐르고, 지금은 우리민족끼리라는 북한 식 구호를 공유하는 음습하고 불온한 정서로 발전했다. 이후 민중사관은 계급사관으로 정형화됐다. 이런 왜곡과정에서 반 대한민국 반 헌법의 국사교과서가 만들어지고, 2300여개 학교에 배포되겠지만, 왜 이 교과서가 문제인가? 이 교과서들이 정작 빼먹고 있는 것은 1969년 '중고등학교 국사교육개선을 위한 기본방향'이라는 제목의 정책보고서를 만든 학자들이 공통으로 품고 있었던 애국주의다. 저자의 지적이 다음과 같다.
"'중고등학교 국사교육개선을 위한 기본방향'에서 제시된 민중적 민족주의의 시각은 주로 일제 식민사학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의 급격한 변화와 시대적 전환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맹점을 지니고 있다. 경제성장의 가속화와 민주화의 달성 등, 1980년대 이후 우리 사회는 역사를 민족주의적 관점에서만 보지 않아도 될 만큼 변화했다. 따라서 일제시기 민족주의 또는 12960~1970년대의 민족주의는 오늘날의 변화된 시대상황에 맞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도 최근의 국사교과서는 여전히 폐쇄적인 민족주의의 사슬에 속박되어있다."
교학사 국사 교과서가 공개되기도 전인 지난 해 인터넷 공간은 물론이고 야당과 일부 편향된 언론매체들, 전교조 등 몇몇 단체들은 입을 맞춘 듯이 이 교과서를 공격하며 만들어낸 마타도어가 이랬다. "교학사 교과서는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로, 유관순을 여자깡패로, 5ㆍ18을 폭동으로 쓴 친일독재 미화 교과서이다." 무엇보다 한국인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하는 절묘한 장난이었는데, 그때 교과서 전쟁은 게임이 판가름났다.
사실 남북한은 일정하게 민족주의 정서를 공유한다. 좌파 민족주의와 우파 민족주의의 차이가 있을 뿐인데, 이걸 종북좌파들이 착각한다. 북한이 온 사회의 수용소화(化) 등 무슨 행악을 해도 좋게 봐줘야 한다며 '민족'이란 명분을 갖다 쓴다. 민족의 이름으로 북한을 감싸지 않는 것은 반(反)민족적이고 반(反)통일적이라는 눈먼 민족 담론으로 줄달음질치는 것이다. 그게 반 대한민국, 반 국가의 기치를 내건 병든 민족주의이다.
'한국사 교과서 어떻게 편향되었나'는 교과서 문제가 실로 만만치 않는 고차원의 교실혁명을 요구하고 있음을 새삼 보여준다. 그 과제는 역사학은 물론 인접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협력 없이는 풀기 어렵다. 박정희 정부 시절의 60~70년대 국사학이 갖고 있는 건강한 애국주의 사학을 부정하고 끝내 자폐의 늪에 빠진 국사학계 대부분 인적 자원들의 한계를 보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작업을 진행하기 위한 밑자료인 이 책은 널리 읽히고 음미되어야 한다는 건 상식이다.
글/조우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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