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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봉수군 권낙돌 그의 최후는...


입력 2014.05.25 10:15 수정 2014.05.25 10:16        영덕 = 데일리안 최진연 유적전문기자

<최진연의 우리 터, 우리 혼>영덕 광산봉수 ‘국태민안’ 비는 오지마을

경북 영덕군 영해면 묘곡에서 대리마을 가는 길은 장장 8km의 첩첩산중이다. 좁은 계곡에 골개천과 나란히 붙은 흑백 영화에서 등장하는 흙길 하나가 마을로 가는 유일한 통로로 국내서 가징 비포장도로다. 산비탈에 농가가 띄엄띄엄 있는 한적하고 조용한 산골의 오지마을,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400년 전이다. 하지만 찾아오는 마을주민 이외는 객이 없을 만큼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2003년 5월, 토지박물관 김주홍 학예사와 기자가 이 오지마을을 찾게 된 동기는 옛 부터 봉수대에서 고사를 지낸다는 제보를 전해 듣고서다. 저녁 무렵 마을회관에 도착하자 무슨 소원이라도 해결해 줄 위인을 만난 듯이 마을이장부터 노인들까지 모여 신기한 듯이 이리저리 쳐다보며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매였다.

4월 초파일 봉수에서 고사를 지내는 오지마을 사람들ⓒ최진연 기자

회관에서 여장을 푼 일행은 마을사람들과 막걸리를 마셔가며 무수한 얘기를 나눴다. 1970
년대 초반부터 마을일을 맡아왔던 박만종 이장(66)은 “언제부터 고사를 지내왔는지 알 수 없지만 어른들께 전해들은 얘기로는 3백년은 족히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봉수대에서 지내는 고사나 동제는 대부분은 봉수제도가 폐지된 후 일제강점기 전후 어수선한 시기에 행해졌다. 대체적으로 무속인들이 봉수대에 올라가 굿판을 벌이면서 토속신앙이 파고든 것으로 역사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원형으로 보존된 영덕 광산봉수대 방호벽 안쪽에 연대가 보인다ⓒ최진연 기자

원래 봉수주변에는 국법으로 일반인의 접근을 엄격히 통제했다. 조선세종 때부터 표석을 세워 거짓 횃불이나 방화가 일어나면 관할병조가 단속하고 위법자는 사형에 처했다.

세종 29년 3월 4일 ‘세종실록’ 기록에는 ‘봉수대 상단에 가옥을 지어 병기(兵器)를 보관하고 아침저녁으로 공급하는 물과 불을 담는데 필요한 그릇을 보관 한다. 또한 무당이나 토속신의 사당건립을 법으로 금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런 것을 볼 때 대리마을의 고사도 일제 강점기 때 행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박 이장은 “1960년대에는 새벽닭이 울면 출발했는데 손전등이 없던 시절이라 벼 짚단에 불을 붙여 봉화산으로 올라가면 반나절이 걸렸다"며 "그렇게 힘들게 올라가던 봉화산도 지난 2000년 산불진압용 임도가 개통되자 반나절에서 두어 시간으로 줄었다”고 전했다.

국태민안을 빌며 소지를 태우고 있는 마을사람들ⓒ최진연 기자

마을사람들은 조상대대로 사월초파일이면 한해도 거스르지 않고 지금까지 봉수대에 올라가 태백산 산신령께 고사를 지낸다. 오지마을의 고사는 이곳사람들에게는 공동체 삶의 정신적 지주이자 상징이 됐다. 이제는 연로한 촌로들만 모여 초라하게 고사를 지내지만, 1980년대 중순까지만 해도 소 한 마리를 제물로 바칠 정도로 7개 부락의 큰 잔칫날이었다.

박 이장은 마을일을 보면서 어른들로부터 들은 중요한 얘기는 수첩에 메모하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고 했다. 이날은 봉화산의 얽힌 특별한 내용을 수첩을 뒤져가며 공개했다.

“봉화대의 마지막 봉군은 권낙돌이란 사람이다. 그는 봉홧불을 피우던 일이 끊어지자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나라에서 준 둔전을 경작하며 봉군숙소에 눌러 앉았다. 그를 걱정한 마을에서는 봄, 가을로 곡식을 모아 올려 보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나라가 해방되자 봉수군은 마을로 내려와 관청을 오가며 동장 일까지 도맡아 보다가 일생을 마쳤다."

붕괴되고 있는 석축연대ⓒ최진연 기자

봉수대가 축조된 봉화산은 북쪽으로는 영양, 봉화로 이어지는 태백산줄기가 겹겹하고, 동쪽은 백암산 줄기가 영해까지 이어졌다.

봉수터는 봉우리를 마당처럼 판판하게 다듬고, 혹시 있을지도 모를 산짐승이나 적의 침입에 대비해 돌로 축대를 쌓아 올렸는데, 둘레는 어림잡아 60m 정도에 1m 높이다. 봉화를 올리던 연대는 방호벽과 암벽을 이용해 둥글게 쌓았는데, 둘레가 약 25m, 높이는 4m 정도다. 연대위에 횃불을 피우던 아궁이는 흔적만 남았다.

오지사람들은 연대로 올라가는 돌계단에 제물을 차리고 고사를 지낸다. 연대와 맞붙은 암벽아래는 동굴이 뚫려있는데 봉군이 근무 중 비바람을 피했던 장소로 추정된다.

봉수대 출입구는 방호벽 남북방향에 개방형으로 뚫려 있으며, 집터와 우물위치는 발견 되지 않았지만 연대주변에 깨진 기와가 널브러져 있어 이곳에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광산봉수의 초기설치는 언제일까? 우리나라 대분의 봉수처럼 기록은 분명하지 않지만 조선시대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쪽 해안에 방향에 있는 영덕 대소산봉수에서 신호를 받아 북쪽 진보 신법산봉수로 전달했던 제2노선 간봉의 내지봉수다.

연대를 둘러싸고 있는 방호벽ⓒ최진연 기자

기자는 14년 만에 봉수대 취재를 위해 다시 대리마을을 찾았다. 박만종 이장과 반갑게 만나 그간의 회포도 나눴다. 이장은 14년 전 광산봉수대 기사가 언론매체를 통해 알려지자 면사무소에서 수년 동안 고사 경비를 지원했다며 감사의 마음을 기자에게 전했다.

박 이장은 이날, 봉화산으로 동행할 사람을 스마트폰으로 찾고 있었다. 옛 봉군들이 주고받던 통신과 다를 바 없는 현대판 스마트폰이 봉홧불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불과 120년 전의 일이다. 세상은 이렇게 최첨단의 문화로 빠르게 변해 버렸다.

오랜만에 답사한 광산봉수대는 마을주민들의 각별한 보살핌으로 지금까지 잘 보존돼 왔으나 최근 태풍이 잦아지면서 연대석축에 배불림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언제 붕괴될지 알 수 없을 정도다.

영덕군청 관계자는 광산봉수에 대해 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산성 또는 봉수대는 문화재 지정 유무를 떠나 보존을 서둘러야 한다. 한번 붕괴된 호국유적은 복구경비도 문제지만 우리의 정신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

최진연 기자 (cnnpho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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