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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비탈에 홀로 된 외로운 얼음 창고 현풍 석빙고


입력 2014.06.22 17:30 수정 2014.06.22 17:32        현풍 = 데일리안 최진연 문화유적전문기자

<최진연의 우리 터, 우리 혼>300년 전 문짝이 지금도 살아 있어

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땅을 직사각형으로 깊게 파고 벽면을 돌로 쌓아 올린 창고다. 매년 12월 경 꽁꽁 언 얼음을 떠다가 이곳에 저장한 후 태양열과 직사광선이 들어가지 않도록 했다. 보관된 얼음은 무더운 여름날 각종제향 때 필요한 음식제조나 관료, 노인, 환자 등에게 사용했다.

우리나라에서 석빙고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신라 3대 노례왕(24~57년)때 얼음 창고를 지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나온다. 지증왕 6년(505)에도 얼음을 보관토록 명령했다는 문헌이 신라본기에 있다.

고려 때도 평양에 내빙고와 외빙고가 있었는데, 내빙고는 사간도무사의 남쪽 언덕에, 외빙고는 십칠간육로문 밖에 있었다고 ‘평양속지’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 11대 문종 3년(1049)에는 매년 6월부터 8월초까지 최고위층에게 3일에 두 번, 고급관리는 일주일에 한 번 씩 얼음을 제공했다는 사료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신라 또는 고려 때의 석빙고는 발견된 것이 전무하다.

산비탈 좁은 공간에 출입구를 낸 현풍 석빙고 ⓒ최진연 기자

현재 현존하는 석빙고는 모두 조선시대 것으로, 관청에서 관리인을 두고 관리를 했다. 민가에서도 나무를 재료로 해 만든 목빙고가 많았다고 하는데 유적의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

국내 남아있는 석빙고의 외관형태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빙실내부 구조는 규모만 다를 뿐 대부분 동일하다. 그러나 어느 석빙고는 관리가 허술해 빙실벽면에 금이 가고 녹색이끼가 두껍게 끼었으며, 바닥은 습지처럼 축축하게 물이 흐르고 있다.

데일리안은 그동안 제대로 공개된 적이 없는 국내 석빙고 내부를 당국의 출입절차를 받아 현장을 취재해 보도하게 됐다.

경북 현풍은 규모가 작은 고을이면서 산비탈 한적한 곳에 석빙고가 하나 있다. 대다수 빙고가 축조된 지역은 큰 고을에 속하는데 이상야릇한 느낌이 든다. 인근에 달성부(대구 옛 지명)가 위치해 있어 왕실에 진상할 생물 신선도유지 때문에 빙실운영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현풍 석빙고 빙 실내부 ⓒ최진연 기자

현풍 석빙고의 축조연대를 두고 여러 견해가 있었으나, 1982년 11월 석빙고 주변 보수작업 때 건성비가 발견됨으로써 말끔하게 정리가 됐다. ‘崇禎紀元後二庚戌十一月’(숭정기원후2경술11월)내용이 적혀 있어 영조 6년(1730)에 축조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빙고는 다른 지역보다 10여년 정도 앞서 만들어져 조선후기 석빙고의 기준이 됐으며, 남아있는 국내석빙고 중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돼있는 석빙고에 속한다.

현풍 석빙고(보물 673호)는 현풍다리를 건너 현풍천 오른쪽을 끼고 약 200m 들어가면 산비탈 아래에 있다. 마치 고분처럼 구릉으로 조성돼 있다. 석빙고 입구는 개울이 흐르는 쪽에 설치하지 않고 산비탈 쪽을 보고 있다. 산 끝자락과 잇닿아 좁은 공간을 두어 불필요한 바람을 막고, 입구 양쪽에는 날개모양의 돌담을 쌓아 찬바람을 빙실 내부로 흘러들게 해 냉각효과를 더욱 높였다.

빙실 입구에는 지금도 오래된 문짝과 고리가 달려있다. ⓒ최진연 기자

빙실 벽과 천장은 4개의 다듬어진 화강석을 이용해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쌓아 올렸다. 사이사이에는 길고 큰 돌을 얹어 아치형태의 내부를 형성하고 있다. 아치 중간에 움푹 들어간 공간에는 더운 공기를 모이게 해 바깥으로 나있는 2개의 환기구로 빠져 나가게 설계돼 있다. 더운 공기는 위로 뜨게 된다는 원리를 응용한 것으로 이것이 석빙고의 설계 중 핵심기술이며, 대단한 과학적 지혜다.

바닥은 약간 경사지게 판판하게 돌을 깔고 흙을 덮었다. 여름에 얼음이 녹지 않도록 통풍장치도 했다. 빙실 끝 중앙에는 배수구를 뚫어 내부의 괸물이 바깥으로 흘러가도록 했는데, 보수공사 때 그만 묻어버렸다고 했다. 손질 하지 말아야 했는데 참 아쉽다.

음식 보관을 잘 하려면 습기와 녹아내리는 물을 잘 관리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바닥에는 배수장치를 하고 빗물 침수를 막기 위해 석화와 진흙으로 방수층을 만들었다. 또한 단열재로 볏짚, 왕겨 등을 사용하고 마지막에 두터운 흙을 덮어 단열효과를 극대화 했다. 바깥 봉토에 잔디를 심은 것도 이 효과를 더욱 크게 하기 위해서다.

옛날 상리 석빙고로 불렀던 현풍 석빙고는 빙실 길이가 9m, 넓이는 5m, 높이 6m로 남북으로 길게 축조돼 있다. 특히 빙실 출입문은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무로 만든 투박한 문짝과 고리가 달려있어 눈길을 끈다.

산비탈에 외롭게 남아있는 빙고 앞에 개천이 흐르고 있다. ⓒ최진연 기자

달성군 관계자는 “석빙고 내부를 공개한 적이 있었는데 몰지각한 관람객들의 오물투척 때문에 국가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를 더 이상 방치하면 훼손이 될 것 같아 비공개를 원칙으로 정했다”고 했다. 기자는 30년 동안 문화재 현장을 출입하면서 이제는 국민정서에 많은 변화가 생겨 유적을 아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음주에 고성방가 하는 습관성 관객이 있는 것을 보아왔다. 특히 젊은 층보다는 나이든 분들이 더 그랬다.

문화재를 감상한다는 것은 유적 앞에서 선조들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일궈놓은 지혜에 감탄을 받고 스스로 마음을 순화시키는 것이 아닐까싶다.

최진연 기자 (cnnpho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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