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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친상간과 친족살해의 비극적 도시, 미케네


입력 2014.11.09 15:50 수정 2014.11.10 09:26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박경귀의 ad Greece 29>트로이 전쟁을 주도한 아가멤논의 왕국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 편집자 주>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고대 그리스 문명의 선두주자는 크레타의 미노스 문명(Minoan civilization)이다. 지중해 한 복판의 섬 크레타에서 BC 3650년부터 BC 1170년경 까지 융성했다. 크레타 문명의 화려했던 자취는 거대한 크노소스 궁전에 남아있다. 하지만 크레타 문명을 전수받아 그리스 본토로 본격적으로 이식(移植)한 주체는 미케네 인들이다. 그들은 발칸반도 북쪽에서 이주한 아카이아인(Achaeans)이었다. 이들이 고대기 그리스문명을 주도하다 보니 당시 그리스인들을 통칭하여 아카이오이족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들이 일군 그리스 본토 최초의 문명이 미케네 문명(the Mycenaean civilization)이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중동부 지역에 위치한 미케네 왕국은 BC 2000년경부터 BC 1200년경까지 융성했다. 미케네 왕성의 지리적 환경은 매우 뛰어나다. 그리스 본토에서 최초의 문명을 일으킬 만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뒤쪽으로는 높고 험준한 산이 좌우로 외호(外護)하고 있다. 마치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의 지세(地勢)다. 왕성은 두 산 사이로 뻗어 나온 한 줄기 등성이를 두 겹의 성벽으로 둘러쌓아 만들어졌다.

중앙의 산등성이에 세워진 미케네 왕성의 모습, 험준한 산을 뒤에 두고 두 겹의 성벽으로 둘러쌓았다. ⓒ박경귀

왕성의 산 아래로는 아르고스 평원이 20여 킬로미터 정도 펼쳐지며, 아르고스와 티린스를 지나 해안가의 도시 네프플리오까지 길게 이어진다. 비옥한 평원에는 오렌지 농장 등이 줄지어있다. 지중해를 향해 활짝 열려있고, 북쪽으로는 산골짜기를 넘으면 코린트를 지나 그리스 본토의 중부지방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다. 왕성은 아르고스 평원을 한 눈에 내려다보면서 통제할 수 있는 탁월한 전망을 갖고 있다. 이곳이 바로 고대 그리스 세계를 호령하던 아가멤논(Agamemnon)의 왕국, 미케네 왕성이다.

미케네 왕성에서 내려다본 전경, 아르고스 대평원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박경귀

아가멤논이 최초로 등장하는 문헌은 역사책이 아니라 문학 작품이다.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를 담은 호메로스가 쓴 대서사시 '일리아스'에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 등 트로이 전쟁의 영웅들이 등장한다. 미케네 왕국의 유적을 답사하면서 먼먼 과거로 여행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미케네는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비극적인 신화와 전설이 얽히고설킨 고장이다. 아가멤논의 선조인 아트레우스(Atreus) 가문에서부터 이어져 온 근친상간과 친족살해의 비극적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에서 숱한 비극 작품과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미케네 문명의 역사 중 가장 융성한 시기를 이끌었던 아가멤논 왕은 트로이 전쟁을 주도했다. 그런데 트로이 전쟁은 실제 있었던 일일까?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 헥토르 등 트로이 전쟁의 영웅들이 살았던 시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문학작품에 등장한 이야기들이 역사상 실제로 존재했었는지, 또 당시의 시대상은 어떠했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쉽지 않다.

더군다나 거의 3300여 년 전의 일이 아닌가. 하지만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신화와 전설을 역사상 실제의 사실로 믿고 이를 규명하고자 옛 이야기들에 나오는 사적지 발굴에 도전한 이가 있다.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 1822~1890)이 무모하다고 여겨진 그 불가능에 도전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하인리히 슐리만이 여덟 살이 될 무렵, 아버지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게오르크 풀트비히 예러스의 '어린이를 위한 세계사'를 사준다. 하인리히 슐리만은 그 책에서, 아이네아스가 등에 아버지 앙키세스를 들쳐 업은 채 어린 아들 아스카니우스의 손을 잡고 불타는 트로이 성을 급박하게 탈출하는 모습의 삽화를 본다. 여기서 그가 받은 강력한 인상은 그의 인생을 바꿔 놓는다.

슐리만은 트로이 전쟁과 얽힌 이야기가 실제 이야기이고, 튼튼한 성벽을 갖춘 트로이가 실존했던 도시라고 확신했다. 그리곤 언젠가 반드시 그 트로이를 발굴해 내리라 결심했다. 그는 이 삽화를 단순한 상상화가 아니라 역사적 현장을 스케치한 생생한 사생화(寫生畵)로 여긴 것이다. 이 한 장의 삽화가 한 인간의 운명을 바꿨고, 그리스 고대 문명의 찬란한 역사를 되살려냈다.

그는 1870년부터 1885년까지 트로이 전쟁의 현장과 참전 영웅들의 도시인 미케네, 티린스, 이타케 등을 발굴하여 트로이 전쟁이 신화가 아닌 역사였음을 증명했다. 우리가 오늘날 트로이와 미케네, 티린스의 유적을 찾아 3600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슐리만의 열정과 노고의 덕분이다. 그가 아니었으면 트로이는 물론 화려했던 미케네 문명은 전설 속의 아련한 이야기로 영원히 묻혀버릴 뻔 했다.

3300년 후세 사람인 슐리만에게 고대 그리스 역사에 대한 열정과 영감을 불러일으켰던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기독교인에게 성서만큼이나 중요한 영원한 교과서였다. 두 서사시에서 신과 영웅들이 엮어내는 파노라마는 그리스인들의 일상의 의식과 문화, 행태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쳤다. 위대한 문학작품이 인간들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지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 앙키세스를 업고 트로이 성을 탈출하는 아이네아스, '고대에 대한 열정'(1997), p.13.

트로이와 미케네, 티린스 등 고대 도시를 발굴한 하인리히 슐리만

BC 1250년 전후로 벌어진 트로이 전쟁은 바로 미케네 문명의 주역인 아카이오이인들과 트로이인들 사이의 전쟁이었다. 트로이는 흑해로 들어가는 헬레스폰트 해협의 길목에 있었다. 지금은 터키 땅에 속한다. 트로이 전쟁의 원인은 흑해로 통행하는 안전한 항로를 확보하려던 그리스인들과 이를 통제하려던 트로이인들 사이의 주도권 다툼으로 벌어졌지만, 전쟁의 명분은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납치해 간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되찾아 오고 트로이를 응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트로이 전쟁은 순탄하지 않았다. 인류 최초의 위대한 대서사시 『일리아스』의 첫 구절은 아킬레우스와 미케네의 왕인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의 불화로 아카이오이족이 겪게 될 고통을 설명하고 있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아카이오이족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을 가져다주었으며,
숱한 영웅들의 굳센 혼백들을 하데스에게 보내고
그들 자신은 개들과 온갖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한
그 잔혹한 분노를! 인간들의 왕인 아트레우스의 아들과
고귀한 아킬레우스가 처음에 서로 다투고 갈라선 그날부터
이렇듯 제우스의 뜻은 이루어졌도다.“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가 불화한 이유는 뭘까. 이것 역시 여자를 두고 벌어진 탐욕에서 비롯되었다. 아가멤논은 트로이 전쟁 과정에서 노획한 아폴론 신전의 사제의 딸 크리세이스(Chryseis)를 첩으로 삼으려 했다. 사제 크리세스(Chryses)는 아가멤논에게 딸을 돌려달라고 간청했지만 아가멤논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크리세스가 아폴론 신에게 이 억울한 사실을 하소연하자, 아폴론은 그리스 연합군의 진중에 화살을 날려 수많은 군사들을 죽인다. 물론 실제로는 트로이군에 패배를 당했던 상황을 말하는 것이었겠지만, 그리스인들은 아폴론의 개입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아폴론 신전의 사제 크리세스가 아가멤논에게 자신의 딸 크리세이스를 돌려달라고 간청하고 있다. 이탈리아 남동부 타란토에서 발굴된 아폴리안(Apulian) 적색상 크라테르의 그림, BC 360~ BC350 년 작품 추정, 르부르 박물관 소장, 사진 Jastrow

그리스 연합군 진영에서는 이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 예언자 칼카스에게 의견을 구한다. 칼키스는 아폴론의 사제의 딸을 돌려보내야 신의 노여움을 풀 수 있다고 말한다. 아가멤논은 할 수 없이 그녀를 돌려보내면서 아킬레우스의 전리품이었던 브리세이스(Briseis)를 대신 데려간다. 이에 아킬레우스가 분노하며 아가멤논을 죽이려 했으나, 아폴론이 제지하는 바람에 뜻을 접는다. 하지만 참전 포기를 선언하고 장기 칩거에 들어간다. 아가멤논은 궁지에 빠졌지만 아킬레우스를 붙잡을 수 없었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오로지 신만이 제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분노한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을 죽이려는 것을 아폴론이 제지하고 있다. Giovanni Battista Tiepolo(1696-1770)의 1757년 작, Villa Valmarana, Vicenza 소장

최고의 맹장이었던 아킬레우스가 빠진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군에 연패하자, 아가멤논은 오디세우스 등 특사에게 많은 선물을 들려 보내며 아킬레우스의 참전을 설득하게 한다. 하지만 아가멤논에 대한 분노가 깊은 아킬레우스는 끝내 자신의 뜻을 꺾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친구 파트로클로스(Patroklos)가 대신 싸우는 것은 허락한다.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나가 분전하여 트로이군을 물리친다. 하지만 그가 과욕을 부려 퇴각하는 트로이군을 깊숙이 추격했다가 헥토르를 만나 죽임을 당한다. 아킬레우스는 절친의 죽음에 아가멤논에 대한 분노를 잠시 접고 불같이 타오르는 분노를 헥토르에게 돌린다.

아킬레우스의 분전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트로이군은 패배하고,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후 그리스 연합군은 ‘트로이 목마’ 작전을 통해 트로이 성을 함락하고, 약탈과 방화로 트로이를 폐허로 만든다. 아가멤논과 그리스 연합군은 숱한 보물과 전리품을 싣고 귀환한다.

아가멤논은 그의 왕성으로 언제쯤 귀환했을까? 아가멤논을 생각하며 미케네 성으로 걸어 올라간다. 비가 자주 오는 2월의 그리스 산야는 푸른 초목이 되살아나 아름다운 풍광을 만든다. 미케네 왕성으로 오르는 길 오른쪽에는 노란 들꽃이 피고 풀들이 파릇파릇 싱그럽다. 관광 비수기인 겨울에 그리스를 유적지를 돌아보면 사람들이 붐비지 않아 좋고, 푸르른 초목을 볼 수 있어 더욱 좋다.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건기인 한 여름에는 풀들이 누렇게 변해 있어 가뜩이나 황량한 유적지들을 더욱 고적하게 만든다.

미케네 성채로 오르는 길이다. 푸른 초목이 싱그럽다. 오른쪽으로 굽은 길의 끝 부분에 성뭉이 있다. ⓒ박경귀

아가멤논은 에게 해가 잔잔해 지는 봄에서 한 여름 사이의 어느 날에 귀환했을 것이다. 파고가 높고 풍랑이 심한 동절기에는 배를 띄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가멤논이 귀환할 때의 정경은 어땠을까? 수많은 백성들이 왕성으로 오르는 연도에 나와 숱한 전리품을 싣고 돌아오는 왕을 열광적으로 환영했으리라. 하지만 열광적 환호와 영예의 화관 뒤에는 추악하고 음산한 분위기가 깔려 있었으리라. 아가멤논의 왕비 클리타임네스트라(Clytemnestra)가 아가멤논을 죽이려 벼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스킬로스는 비극 『아가멤논』에서 아가멤논이 트로이 전쟁에서 미케네로 귀환하는 순간부터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살해당하는 과정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특히 아가멤논 가문에 “아교처럼 단단히 붙은” 재앙과 저주의 씨앗이 무엇이었는지 밝히고 있다. 미케네 유적 답사는 ‘보는 답사’가 아니라 ‘생각하는 답사’가 될 수밖에 없다.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추악한 친족살해의 범죄가 끊임없이 발생했던 최악의 가문이 바로 아트레우스 가문이다. 모든 악행은 미케네 왕국의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끝없는 탐욕과 이전투구(泥田鬪狗)에서 비롯되었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왜 아가멤논을 죽이려 했을까? 직접적인 원인은 트로이 전쟁과 연관된다. 아가멤논이 이끄는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를 정벌하기 위해 보이오티아의 항구 아울리스에 집결했다. 하지만 풍랑이 거세어 대함대의 출항이 계속 지연되었다. 아가멤논의 딸을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제물로 바쳐야만 출항할 수 있다는 예언자의 예언에 따라 아가멤논은 자신의 큰딸 이피게네이아를 희생시킨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와 <타우리케의 이피게네이아>는 이피게네이아의 희생과정과 그녀가 아르테미스 여신에 의해 구원 받은 이후의 삶을 그리고 있다.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으로써 자신의 희생적 리더십을 보여야 하는 아가멤논은 자신의 책무와 자식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번민한다. 이피게네이아는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려는 아버지 아가멤논에게 크게 반발한다.

“햇빛을 보는 것이 인간들에게 가장 큰 즐거움이며,
지하세계는 아무것도 아녜요. 죽기를 기원하는 자는
미친 자예요. 고상한 죽음보다 비참한 삶이 더 나아요.“(1250~1253)


왕비 클리타임네스트라 역시 딸을 희생에 결사반대하며 아가멤논을 비난한다. 하지만 이피게네이아는 결국 트로이를 징벌하려는 헬라스 함대의 출항을 뒷받침함으로써 ‘헬라스의 해방자’라는 명성을 얻는 길을 택한다. 이피게네이아가 희생되는 순간, 아르테미스 여신은 사슴을 보내 그녀 대신 피를 뿌리게 하고 이피게네이아를 거두어 간다. 아무튼 딸을 희생시킨 아가멤논에 대한 증오와 원한은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아가멤논을 살해하는 중요한 구실이 된다.

이피게네이아가 희생 제물이 되려는 순간 아르테미스 여신이 암사슴을 대신 희생시키며 이피게네이아를 제지하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 Louis Billotey 1935 작품, 사진 Louis Billotey

하지만 왕비가 아가멤논을 죽이려 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아가멤논이 없는 10년 동안 아가멤논의 사촌인 아이기스토스의 유혹에 넘어가 그의 정부(情婦)가 되어 있었다. 왕비는 자신의 불륜이 들통 날 것을 두려워 한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결국 아이기스토스와 공모하여 아가멤논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자신의 계획을 은폐하기 위해 아가멤논이 귀환하는 그 날, 아가멤논을 극진하게 환대한다. 그녀는 아가멤논에게 자신이 독수공방하느라 너무나 괴로웠고, 트로이에서 아가멤논에 대한 나쁜 소식들이 들려올 때마다 목을 매려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가증스러운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아가멤논>의 공연에서 “너무 많은 눈물을 흘려 이제는 눈물도 말라버렸”다는 그녀의 애절한 말을 들던 아테네의 관객들은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그녀의 음흉한 흉계는 아가멤논의 경계심을 완전히 해체시킨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미케네 왕성으로 오르는 길에 자줏빛 융단을 깔아 놓고 아가멤논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영예로운 카펫을 밟고 오르길 청한 것이다. 신의 노여움을 살 수 있다며 거절하던 아가멤논은 왕비의 계속되는 강권에 못 이겨 신발을 벗고 맨발로 카펫을 밟고 왕성에 들어간다. 아가멤논은 자줏빛 융단이 영예의 길이 아니라 죽음으로 향하는 제단이었음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미케네 왕국은 BC 2000년경에 소왕국을 형성하고, BC 1600년경부터 BC 1200년경까지 최고의 번영을 누렸다. 미케네 성채는 400년에서 길게는 800년 까지 미케네의 화려한 왕궁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아가멤논은 미케네 왕국 역사에서 가장 부강한 시대를 이끌었다.

미케네 왕국의 국력이 얼마나 강성했던 가는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는 그리스 각지의 군세(軍勢)로 가늠해 볼 수 있다. 『일리아스』의 함선 목록에 의하면, 이타케의 오디세우스가 함선 12척, 헤라클레스의 아들 틀레폴레모스가 함선 9척, 아킬레우스가 함선 50척, 크레타의 메리오네스가 함선 80척을 이끌었던 데 비해, 아가멤논은 함선 100척을 이끌고 참전했다. 아가멤논이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 옹립된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를 따라온 백성들은 수도 가장 많고 또 가장 용감했다.
그들 한가운데서 그 자신이 번쩍이는 청동을 입고 호기롭게
나아가니 모든 영웅들 중에서도 유난히 돋보였다.
아가멤논은 가장 훌륭한 데다 가장 많은 백성들을 지휘했기 때문이다.“(Ⅱ, 577~580)


당시 미케네는 이미 선발 주자였던 크레타 문명을 제키고 그리스에서 가장 번성한 문명을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미케네가 본토 그리스의 여러 왕국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미케네 성곽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미케네 왕성은 바위산 위에 길이 2미터가 넘는 거대한 돌들을 잘 다듬어 두텁게 구축했다. 인간의 힘으로 쌓았다고 보기 어려울 만큼 거대하고 견고한 성채다. 거인족 키클롭스가 쌓았다는 전설이 생긴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3600년이 넘었는데도 성벽의 견고한 기단부분이 그대로 남아있다.

미케네 왕성의 성벽이다. 거대한 돌의 구축물이다. 한 무리의 그리스 대학생 답사단이 성벽의 기초가 된 바위에 걸터앉아 지도 교수의 설명을 듣고 있다. ⓒ박경귀

아가멤논은 자줏빛 융단을 밟으며 당대 그리스 최고의 왕국인 미케네 왕국의 사자문을 넘었으리라. 사자문은 미케네 성채의 상징이다. 성문의 양식은 단순하지만 집채만한 바위를 다듬어 놓아 육중하고 견고한 느낌을 준다. 3미터가 넘은 문설주를 양쪽에 세우고, 그 위에 4미터가 넘는 가로대를 얹었다. 문설주와 가로대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다. 엄청난 길이와 너비를 가진 거대한 너럭바위를 다듬어 세우고 얹은 셈이다. 엄청난 크기와 무게를 지닌 이 성문은 어떠한 파괴에도 끄떡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3600년을 넘게 그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비결이다.

각각 하나의 바위인 문설주와 가로대로 구축된 웅장한 미케네의 정문이다. ⓒ박경귀

미케네 성채의 정문을 아가멤논은 승리자의 벅찬 기쁨을 안고, 슐레이만은 4천년 역사를 지닌 신비의 성채에 대한 설렘과 호기심을 안고 넘었을 것이다. 미케네의 이 주문(主門)은 문 위에 설치된 2.9미터 높이의 삼각 돌에 새겨진 사자 문양 때문에 사자(獅子門)문으로 불린다. 삼각 돌은 가운데 왕권을 상징하는 하나의 기둥을 세우고 양쪽에 두 마리의 사자가 이 기둥을 수호(守護)하는 모양을 취하고 있다. 이 곳이 왕성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기둥이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 궁전의 기둥을 빼닮아 흥미를 끈다. 기둥 위의 벽체를 장식한 동그라미 문양까지 그대로 닮았다. 그리스 고대 건축의 대부분의 기둥들이 밑둥이 더 굵거나, 중간을 더 굵게 만드는 엔타시스(entasis) 양식인데 반해, 이 기둥은 위로 올라갈수록 굵어지는 독특한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크레타 고유의 건축 양식이다. 미케네 문명이 1600년 이상 먼저 부흥했던 크레타 문명 양식을 그대로 전수받았다는 확실한 증거다. 이 부조물이 만들어진 시기는 성채의 역사로 미루어보아 최소한 3600년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그리스 석조 부조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예술작품이 되는 셈이다.

미케네 성문 위에 구축된 거대한 삼각 바위 돌, 왕권을 상징하는 기둥과 이를 수호하는 사자가 부조되어 있다. ⓒ박경귀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 궁전의 일부이다. 위로 갈수록 굵어지는 독특한 기둥 양식을 하고 있다. ⓒ박경귀

미케네 성채 안에서 바라본 사자문이다. 사자문은 기념사진을 찍는 배경으로 가장 인기 있는 곳이다. ⓒ박경귀

사자문을 넘어선 아가멤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죽음의 그림자였다. 반면 슐레이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황금 보물들이었다. 미케네 발굴의 최대의 성과는 바로 사자문 뒤에 꼭꼭 숨겨져 있었다. (다음 회는 아가멤논의 죽음과 아트레우스 가문은 비극적 저주, 그리고 미케네 왕궁에서 발굴된 화려한 황금 예술품들이 소개됩니다.)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kipeceo@gmail.com)

박경귀 기자 (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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