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 김호정 "힘들었지만 운명 같은 작품"(인터뷰)
임권택 감독 102번째 영화…시한부 아내 역 열연
"출연 자체로 영광…암투병 환자 담담하게 연기"
"연기할 때 욕심내서 잘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이번 작품은 몸과 마음을 비우고 촬영했어요. 처절하게 죽어가는 인간의 모습에 삶의 단편들을 녹아냈죠. 자연스럽고 현실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다음 달 9일 개봉하는 영화 '화장'에서 배우 김호정은 말기 암 환자인 아내 역을 맡았다. 한국 영화계의 살아있는 전설 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작품 '화장'은 소설가 김훈의 동명 단편소설을 바탕으로 했다.
'화장'은 얼굴을 곱게 꾸미는 '화장(化粧)'과 시체를 불에 살라 장사를 지내는 '화장(火葬)'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지닌다. 영화는 서로 다른 소재를 통해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과 인생의 깊이를 묘사한다. 중년 남성 오상무를 연기한 안성기도 그렇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쉽사리 잊히지 않는 배우가 있다. 바로 김호정이다.
삭발·체중 감량이 빚어낸 열연
지난 26일 서울 사간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호정은 영화 속 시한부 캐릭터를 훌훌 턴 듯 밝은 모습이었다. 그는 "임 감독님 영화에 출연한 것 자체만으로도 영광"이라며 "정말 운이 좋았다"고 웃었다.
극 중 김호정이 맡은 아내 역은 이름이 없다. 그냥 '아내'다. "아내가 상징하는 의미가 커요. 젊은 여자에게 한눈을 파는 오상무에게 결혼이라는 현실, 그리고 아픈 아내라는 묵직한 존재감을 줘요. 그 자체가 스트레스죠.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더 강렬한 의미를 전달합니다."
죽음을 앞두고 고통스러워하는 캐릭터를 표현하는 건 쉽지 않았을 터. 하지만 김호정은 병이 진행될수록 점점 쇠약해지는 아내의 심정을 사실적으로 보여줬다.
촬영은 머리에 수술 자국을 분장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다음엔 고통의 연속이다. 아픈 캐릭터 탓에 자세를 똑바로 할 수도 없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고개를 숙여야했고, 또 침대에 누웠다. 세트장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을 정도로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캐릭터를 위해선 삭발을 감행하고, 체중을 8kg이나 감량했다. 사과 반쪽, 현미밥, 두부, 아몬드 등으로 구성한 식단을 지키며 오롯이 '아내'가 됐다. 그러나 여자이자 여배우로서 삭발하는 건 쉽지 않았다.
"삭발했던 날 기분이 이상했어요. 모든 스태프가 절 쳐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죠. 그때 영화와 전혀 상관없는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어요. 제가 몰랐던 모습이 드러난 기분도 들었고, 꿈속에서 제 모습을 본 듯했어요. 울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촬영했습니다."
'화장'은 젊은 여자와 병든 아내 사이에서 번민하는 중년 남자의 모습을 통해 묻는다. 이 남자를 비난할 수 있느냐고. 배우이자 인간 김호정에게도 물었다.
"인간은 누구나 멋있는 사람을 보고 가슴이 설레요.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끌리는 게 사랑인데,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게 잘못은 아니에요. 다만 극 중 오상무에겐 아내가 있었잖아요. 아내에게 책임을 다하면서 그런 건데 결국 젊은 여자와 이뤄지지 않아요. 남편으로서 지켜야 할 약속을 끝까지 지킨 거죠. 오상무의 내적 갈등을 공감할 수 있었어요."
김호정은 배역을 온전히 흡수한 듯했다. 그는 "아픈 사람은 의지할 사람이 필요하다"며 "혼자선 아무것도 못한다는 걸 잘안다"고 말했다. 아내가 오상무에게 "내가 죽었으면 좋겠지?"라고 한 대사에선 여러 감정을 느꼈다.
"자존심도 세고 당당한 아내가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두는 걸 알았을 때 무너져요. 질투하는 모습에선 끝까지 여성성을 잃지 않으려는 아내의 절박한 심정도 느끼고요"
"노출에만 주목하는 언론, 안타깝고 슬퍼"
김호정은 아내의 진심이 욕실 장면에서 드러난다고 말했다. 가장 마음에 와 닿은 장면이기도 했다. 대·소변을 조절할 수 없는 아내는 화장실에서 남편에게 기댄다. 자기 몸을 통제할 수 없는 서러움과 부끄러움에 흐느끼며 남편에게 말한다. "미안해, 미안해"라고.
"아내는 진심을 잘 표출하지 않는 여자예요. 이 장면을 통해 비로소 남편에게 말하죠. '아파서 정말 미안하다'고요. 그래도 끝까지 지켜준 남편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묻어난 신이에요."
이 장면에서 김호정은 성기 노출을 했다. 여배우로서는 파격 시도다. 영화에선 자극적이지 않게,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치부를 드러내기 싫은 아내의 울부짖음이 심장을 건드린다. 처절함 속에 드러난 인간의 고통이 지극히 현실적이다.
김호정은 언론이 노출이라는 단어에만 주목해 안타까웠다고 토로했다. 충격을 받은 그는 자신의 마음을 '멘탈 붕괴'라고 표현했다.
"앞뒤 내용은 다 잘라버리고 '성기 노출'이라는 제목만 쓰는 매체들을 보고 속상했어요. 영화 기사는 영화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 건데 그런 내용이 전혀 없었어요. 그런 자극적인 기사가 인터넷을 도배하고 있는 걸 보고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라며 생각했죠. 신뢰하던 신문들조차 그런 식으로 기사를 쓰니 세상에 배신당한 느낌이었죠."
"슬프고 무서웠다"는 김호정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수천 개의 기사와 댓글을 봤는데 인간에 대한 기본 예의를 망각했다고 생각해요. 사람을 쉽게 취급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화장'이 담긴 주제보다 '노출'만 언급돼서 제작진, 배우들에게 죄송했어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사랑'에 대해 물었다. 영화는 오상무가 젊은 여자를 보고 느끼는 '활활 타오르는 사랑'도 있지만, 남편으로서 아내의 곁을 지킬 수밖에 없는 '의무적인 사랑'도 있다고 말한다.
"책임을 지는 것도 사랑의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결국엔 여자를 받아들이지 않잖아요. 그래서 매력적이죠. 탐욕적인 마음을 참는 인간의 모습이에요."
상대 배우 안성기와의 호흡은 최고였다. "안성기 선배가 많이 배려해주셔서 편안한 마음으로 찍었어요. 선한 사람이라 모두가 좋아하는 분이고, 배우로서도 철저하세요. 연기적 섬세함, 해석력 등이 뛰어나요. 깊이감 있는 배우죠. 정말 존경합니다.(웃음)"
1999년 영화 '침향'으로 데뷔한 김호정은 2001년 영화 '나비'로 스위스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청동표범상(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후 연극 무대에서도 활동했고 영화는 '꽃피는 봄이 오면'(2004), '즐거운 인생'(2007), '로니를 찾아서'(2009) 등을 찍었다. '화장'은 오랜 공백기를 깨고 만난 작품이었다.
"출연하기 전까지 꽤 망설였어요. 결과적으론 잘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역할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과 용기가 생겼거든요."
힘든 시간을 보낸 그가 내린 삶의 정의가 궁금해졌다. "제가 겪은 고통을 상기하면서 연기해야 되나 끊임없이 고민했어요. 그러다 마음을 고쳐먹고 난 후 '운명'이라고 느꼈어요. 모두가 죽음을 향해 달려가지만 뜻하지 않게 좋은 결실도 내는 것 같아요. 지금의 저처럼요. 이렇게 복귀할 수 있을 거라 생각 못 했거든요.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인 듯합니다.(웃음)"
최근 SBS 월화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에도 출연 중인 김호정은 "신인의 자세로 돌아간 것 같다"며 "정말 즐겁다"고 소녀처럼 웃었다. "이젠 여유가 생겼다"는 그의 모습을 안방에서 자주 볼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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