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스보다 독한 카더라..." 사투 벌이는 의료진을...
“목숨걸고 진료하는데...” 정작 가족들은 보균자 취급
"우리 동네 격리자 있다" 개인정보 노출 매장시키기도
“메르스보다 더 무서운 건 ‘카더라’로 사람을 완전히 매장시키는 겁니다.”
최근 메르스 확진환자가 나온 병원을 방문했다가 자가격리된 20대 여성 A씨가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발열이나 구토 등의 의심증세가 전혀 없이 일정 기간 자가격리 원칙을 지키고 있음에도, 평소 믿었던 이웃들을 통해 ‘우리 동네에 메르스 자가격리자가 있다. 병을 옮길 수도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핵심 개인정보까지 노출, 사실상 확진환자 취급을 받고 있어서다.
또 다른 자가격리자 B씨(남)도 “한 번 자가격리자로 낙인이 찍히면, 증상이 없어 격리가 해지된 경우에도 왕따 신세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며 “메르스 확진이나 의심환자가 아닌 단순 자가격리자에 대해서는 신상정보 등이 주변에 유출되지 않도록 주변에서 배려를 해줬으면 좋겠다. 아울러 당국도 이에 대한 조치를 취해줘야한다”고 호소했다.
일부 자가격리자들의 주거지 이탈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아지면서, 대다수 자가격리자들의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일단 2주간 외출이 일절 금지된 채 집에 갇혀 지내야하는 심리적 불안감은 물론, 일상 생활에서 겪는 불편함도 심각한 수준이다. 게다가 설사 자가격리 기간이 지나고 증상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지역 주민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실제 자가격리 기간 종료 후 단순 감기나 건강에 이상이 있을 경우, 메르스로 의심받을 것이 두려워 이를 숨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에 대해 B씨는 “메르스와 아무 상관 없이 감기 걸린 것으로 확인이 됐는데도 남들 시선이 두려워 아프다는 말도 못한다”며 “당국에서 하라는대로 자가격리 원칙을 지켰고 증상도 없는데 왜 이렇게 범죄자나 괴물 취급을 당해야하나”라고 토로했다.
‘메르스 왕따’ 고통을 겪는 건 아이들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19일 대구 수성구 소재 한 사설 학원은 자가격리자와 같은 중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학원에 나오지 말라”며 강제 퇴원을 시켰다가 학부모들의 거센 항의에 부딪쳤고, 결국 ‘등록 말소’ 처분을 받게 됐다.
대구시교육청에 따르면, 해당 영어전문학원은 대구 지역 첫 메르스 확진환자(154번)의 자녀와 같은 중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에게 학원 수강 중단을 요구했다. 또한 해당 학교 학생들에게는 학원 입학 시험에도 응시하지 못하도록 막는 한편, 이같은 내용을 학부모들에게 문자메시지로 알리고 홈페이지에도 버젓이 게시했다.
“목숨걸고 진료하는데...” 정작 가족들은 보균자 취급
더 괴로운 건 가족이 당하는 고통을 지켜보는 일이다. 특히 감염 우려를 무릅쓰고 진료 현장에서 사투를 벌이는 의료진의 경우, 정작 자녀들이 '보균자' 취급을 당하는 경우가 잇따르고 있다. 메르스와 무관한 자녀가 병원 진료를 거부당하는가 하면, 학교에서조차 등교를 자제해달라는 요청을 받는 실정이다.
메르스 확진 환자를 진료한 뒤 2주 간 격리됐던 한 병원 직원은 최근 아들이 다니는 학교로부터 “당분간 아들이 학교에 나오지 않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의 아내 역시 아들의 친구 부모에게서 아이의 등교 자제를 부탁하는 문자메시지도 받았다. 이뿐 아니라, 아들이 주변 친구들로부터 ‘메르스 왕따’를 당하고 있던 사실도 뒤늦게 알게됐다.
그는 "내가 감염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아이는 전혀 문제가 없는 상태다. 내가 의사 아닌가”라며 “의학적으로 아무리 설명을 해도 다른 부모들과 선생님들이 상당히 불안해하고 있어서 굉장히 억울하다. 의료진들이 매일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정작 우리 아이들이 무슨 잘못인가"라고 말했다.
아울러 경남 지역에서 메르스 확진 환자가 다녀간 병원의 간호사인 D씨 역시 얼마 전 4살배기 아들이 손발에 물집이 생겨 병원에 방문했지만, ‘아이가 메르스 보균자일지 모른다’는 이유로 진료를 거부당하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D씨는 “우리가 확진 환자 가족도 아니고, 단순히 병원 직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하니 너무 화가나고 속상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대한의사협회는 메르스 의료진과 그 자녀가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않도록 조치해줄 것을 교육부에 요구했으나, 교육당국도 현재까지 이렇다할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질병관리본부로서도 이에 대한 부처 간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 한, 의료진과 가족을 보호할 뾰족한 방도가 없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노환규 전 의사협회장은 “의료진들은 항상 위험과 맞서서 싸우고 있다. 전신 방어복을 입고 환자를 진료하는 분들의 고생이 말도 못 한다”며 “내가 보는 환자가 감염자인지 처음 구분하는 것이 힘든 상황에서 계속 진료를 하고 있는 의료진들의 노고가 정말 크다. 그런데 그런 의료진과 가족들을 기피하고 꺼리는 현상들이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노 전 회장은 지난 16일 SBS 라디오에 출연해 이같이 말한 뒤, “초창기에는 아이들 학교에서 아예 출석하지 말아달라는 요구까지 받았다. 그래서 의료진이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며 의료진과 그 가족들에 대한 성숙한 시민 의식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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