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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내려간 어느 취준생 '인삼녀'의 추석 고행기


입력 2015.10.01 09:55 수정 2015.10.01 10:08        박진여 기자

토익 응시료 내고 남은 돈 고속버스 타고 귀향

친척 안마주치려 돌다가 귀경하자마자 자소서

서울 양재동 aT센터에서 열린 신세계그룹&파트너사 채용박람회에서 취업희망자들이 채용 게시판을 살펴보고 있다.ⓒ연합뉴스

대학 졸업 후 청년인턴만 3차례. 인턴만 3번 경험해 친구들 사이 ‘인삼녀(인턴만 3번한 여자)’로 통하는 최정미 씨(26)는 올 추석 취업준비생 신분으로 고향 길에 올랐다. 서울 강남구의 한 고시원에 거주하는 정미 씨는 계절이 지난 옷가지로 발 디딜 틈도 없는 방 안의 짐을 최소화하고 택배비를 절약하기 위해 양손가득 부모님 용돈이 아닌 자신의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고향 광주에 내려갔다. 사실상 ‘백수’로 가족의 걱정거리가 된 정미 씨가 고향에 가겠다고 결정하기까지 수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오는 10월은 남은 하반기 취업 준비에 매진할 계획이기에 ‘명절’이라는 명분보다 고향에 가지 않은 기간만큼 오래 묵은 짐들을 처리할 요량으로 고향 길을 택했다.

9월 25일 추석 연휴 전 날. 정미 씨는 여느 때처럼 오전 토익수업을 마치고 오후 스터디를 위해 근처 카페로 향하던 중 엄마의 “언제 올 거냐”는 연락을 받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막연히 ‘이번 명절엔 가야지’하고 생각만 했지 기대하지 않았던 만큼 날짜도 생각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곧이어 정미 씨의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려댔고, 엄마였다. 고민 끝에 받은 전화에서는 “할 것도 없으면서 오늘 와”라는 말이 날아들었고 정미 씨는 “나도 바빠!”라며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오후 스터디에 참석한 정미 씨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명절 스트레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정미 씨의 말에 공감하던 사람들 중 다수는 고향에 내려가지 않겠다고 입을 모았다. 이에 정미 씨의 마음이 세차게 흔들렸지만 당장 쌀쌀해진 날씨에 필요한 겉옷과 수입이 없는 상황에서 바닥을 보이는 통장을 생각하니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벌이도 미래도 깜깜한 마당에 얼굴도 비추지 않고 집에 이것저것 보내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9월 26일 추석 연휴 첫 날. 남은 용돈을 한 달 뒤 있을 토익 응시료로 올인한 정미 씨에게 최근 개통된 서울-광주 간 KTX는 '그림의 떡'이었다. 명절을 맞아 꽉 막힐 도로를 생각하니 새벽부터 눈이 떠진 정미 씨는 오전 8시 ‘일반석’ 차표를 끊었다. 오랜 시간 고속버스에 갇혀야 함에도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른 시각 출발한 버스는 오후 2시가 다돼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정미 씨는 6시간 넘게 달리는 버스 안에서 친척들을 만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 생각하며 멀미에 시달렸다.

‘큰집’인 정미 씨 집으로 모인 친척들의 기척이 문밖까지 느껴졌다. 망설임 끝에 문고리를 잡은 정미 씨에게 소란스러운 풍경이 덮쳤다. 정미 씨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부모님과의 전화통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했던 상반기 취업에 성공한 동갑내기 친척이었다. 또 그 자리에는 대학생이 된 친척 동생들도 함께 있었다. 현실을 마주한 것 같은 기분에 노트북과 각종 교재를 짊어진 어깨의 무게가 고스란히 정미 씨의 마음을 짓눌렀다. 정미 씨는 부모님의 강요 아래 취업에 성공한 또래 친척들에게 조언을 구했고 “일단 영어점수를 완벽히 만들어 놔야한다”는 뻔한 답변에 연신 고개를 끄덕여가며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정미 씨는 답답해진 마음에 방으로 들어와 토익교재를 펼쳤다.

9월 27일 추석 당일. 추석 제사를 마치고 분주하게 짐을 싸는 친척들 속에서 정미 씨도 가방을 챙겼다. 근처 카페에 가 하반기 자기소개서를 준비하고 영어공부를 하기 위해서다. 정미 씨는 가지고 온 토익교재와 인적성 교재, 노트북을 무겁게 챙겨들고 명절에도 문을 연 카페를 찾아 나섰다. 사실 연휴 동안은 ‘자체휴무’를 가질 수도 있었으나 부모님의 성화를 피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정미 씨는 평소처럼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구인구직 사이트를 훑어보고 자기소개서를 작성했다. 또 따로 준비하는 기업 채용에 대비해 인적성과 영어회화를 준비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정미 씨는 곧장 방으로 들어가 구인구직 사이트와 관련 커뮤니티를 기웃거렸다. 또 쉬는 시간에도 거실에 있는 TV를 두고 노트북으로 방송을 시청했다. 정미 씨가 부모님을 피하게 된 것은 세 번째 인턴 기간이 끝나고 백수가 된 지난해 6월부터다. 대학을 졸업하고 크고 작은 회사에서 여러 번 인턴생활을 했지만 무급일 때도 있었고 채용과 연계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후 정미 씨는 ‘정규직’과 ‘좋은 처우’에 집중해 대기업 공채 원서를 쓰며 번번이 불합격의 고배를 마셨다.

9월 28일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올 것이 왔다. 겉옷과 식료품을 챙기던 정미 씨에게 부모님의 호출이 날아들었다. 정미 씨의 어머니는 "박사 따는 것도 아니고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느냐"고 다그쳤고 정미 씨의 아버지 역시 "지방에 내려와 작은 회사에 취직해 경력도 쌓고 결혼해 아이도 낳으면 얼마나 좋아"라고 거들었다. 이에 정미 씨는 이번 하반기를 목표로 대기업 여자 신입 마지노선 나이로 알려진 27살 까지 도전해 보겠다고 준비했던 대사를 꺼냈다. 이어 정미 씨는 말이 나온김에 언제 말할까 고민했던 말을 겨우 꺼냈다. "용돈 좀 주세요..."

부모님이 챙겨준 반찬과 겉옷 등 짐을 챙긴 정미 씨는 서둘러 서울행 차표를 예매했다. 더 쉬다 가라는 부모님의 말에 ‘대체휴일’이 무슨 의미가 있냐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정미 씨는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가 ‘뭔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부모님과 터미널에서 작별인사를 마친 정미 씨는 버스에 올라 모바일 구인구직 사이트를 뒤적거리며 온갖 생각으로 잠 한 숨 자지 못했다.

9월 29일 추석 대체휴일. 서울로 돌아온 정미 씨는 오전 9시 토익수업을 위해 이른 아침 눈을 떴다. 수업을 마치고 여느 때처럼 하루에 2차례 잡힌 스터디를 준비하기 위해 카페에 들렀다. 평소 직장인들이 거리로 쏟아지는 시간대지만 추석 대체휴일로 한산했다. 여전한 명절 분위기에 정미 씨는 고향에 내려갔다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빼고 바쁘게 돌아가는 사회에 도태되지 않고 편승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정미 씨는 내년 2월 설날 취업소식을 안고 고향에 내려가는 날을 꿈꾸며 스터디 준비에 매진했다.

박진여 기자 (parkjinyeo@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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