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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의 책사가 밝힌 김정일 권력승계의 또 다른 비밀


입력 2015.12.25 09:57 수정 2015.12.25 09:57        데스크 (desk@dailian.co.kr)

<굿소사이어티 서평>김일성은 자화자찬하며 살던 어리석은 상왕

'나는 자유주의자이다' 김덕홍 지음 도서출판 집사재 펴냄
다른 건 몰라도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공유할 수 없다는 게 세상의 통념이다.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북한의 권력 세습은 그걸 깼던 정말 흔치 않은 사례로 두고 두고 연구대상인데, 지금도 미스터리다. 수많은 관점과 설(說)이 있지만, 예전에 이란 책을 쓴 미국 저널리스트 마이클 브린의 통찰은 이렇다.“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세습 왕조가 세워지게 된 배후에는 아버지의 사랑과 지지를 받으려는 아들의 피나는 노력이 숨어있다.”(119쪽)

즉 김정일 역할론인데, 지금 북한이란 거대한 불행한 체제의 씨앗은 ‘아버지처럼’을 신앙으로 했고, 그걸 확산시킨 주범 김정일의 탓이란 게 그의 지적이다. 그가 후계자로 대외적으로까지 공식화된 것은 1980년 6차 당대회였는데, 이전과 이후는 판이하게 바뀌었다. 그렇지 않아도 정치문화의 다양성이 없던 평양은 유일사상 체제로 빠르게 얼어붙었는데, 이 모든 변화의 가속도는 김정일이 부추긴 것으로 평가된다.

김일성은 아들의 효성에 감동했지만 사회는 무균질의 진공 사회로 바로 전락했고, 10여년 뒤 이른바 300만 명 집단 아사자를 만들어내는 초유의 비극으로 연결됐다. 그럼에도 ‘당중앙’으로 호칭되며 아버지와 공동통치를 시작한 아들에게 개혁 개방이란 스며들 여지조차 없었다. 늙은 아버지는 흐뭇했고, 젊은 아들은 권력을 넘겨받아 만족했다.

‘신정(神政)국가’ 북한을 세운 건 후계자 김정일

북한사회는 두 번 죽어야 했다. 개정된 당 규약에서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뛰어넘어 북한의 통치이념으로 격상됐다. 주체사상은 김정일의 등장 이후 신정(神政)국가의 도그마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 나는 4년 전 '월간 중앙'에 썼던 글에서 초기 기독교에 비유컨대 그는 신앙체계를 만들었던 사도 바울의 역할에 해당한다고 규정했다. 그것도 아버지가 살아있는 당대에!

그래서 현대북한은 두고 두고 연구대상인데, 이윽고 아버지 김일성은 살아있는 신(神)의 반열에 올랐다. 이 과정을 총지휘한 김정일이란 녀석이야말로 역사 속에서 보지 못했던 종류의 음흉한 후계자였다는 게 내 판단이다. 최근 나온 신간 '나는 자유주의자이다'(김덕홍 지음 도서출판 집사재 펴냄)는 주체사상을 만든 황장엽과 함께 망명했던 김덕홍의 저술인데, 조금은 또 다른 얘기를 담고 있어 흥미진진했다.

김덕홍의 증언에 따르면, 권력 이양의 키를 쥐었던 것은 뜻밖에도 김일성이다. 김일성이 먼저 움직였고, 김정일은 따라왔다는 뜻인데, 구체적으로 김정일을 후계자로 내정한 것은 김일성의 나이 예순두 살이던 1974년도의 일이다. 그 해 2월 비공개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자신의 아내이자 실력가이던 김성애를 쳐내고, 김정일을 후계자로 지목하기에 이르렀다.

“(김일성은) 김성애는 야심가이고, 처남 김성갑은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깔아뭉개면서 ‘곁가지가 무성하게 자라면 본가지가 크는데 장애가 된다’며 김정일에게 힘을 실어줬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김정일은 그들을(의부엄마 김성애와 친척들을) 쉬이 처리하지 못했을 것이다.”(118쪽)

권력의 심층을 지켜본 사람이 김덕홍인지라 리얼한 증언인데, 놀랍게도 이후 김일성은 빠른 속도로 권력의 핵심에서 멀어져 갔고, 동시에 망가지기 시작했다. 김덕홍의 표현이 재미있다. 김일성은 “날마다 자화자찬하며 제 기분에 들떠 사는 어리석은 상왕(上王)”으로 추락했다. 공산주의 역사에서 제일 풀기 어려웠던 후계문제를 제일 먼저 해결했다고 자화자찬을 했는가 하면 현실과 전혀 다른 헛소리를 연방 해댔다.

김일성은 자화자찬하며 살던 어리석은 상왕(上王)

“우리는 지금 공산주의 문어귀에 와 있습니다. 사회주의 틀거리를 다 만들어 놓았는데, 이제 그것만 돌리면 세계선진국 대열에 들어가게 됩니다.”, “세상에 조직비서동지(김정일) 같은 충신, 효자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나를 받들어 모셔온 것처럼 조직비서동지를 모시고 대를 이어 충성과 효성을 해야 합니다.”

이런 와중에 교활한 김정일이 했던 일은 어리석은 상왕인 아버지를 속여먹는 작업이었다. “그 동안 인민을 위해 고생만 해온 수령님께 인민의 행복상만 보여주자”는 게 그의 황당한 주문이었다. 그걸 위해 모든 걸 자기에서 먼저 보고하도록 시스템을 만들어 아버지를 핫바지로 만들고, 이른바 견본경제로 눈을 가렸다. 김일성이 만족할만한 샘플만을 눈요기용으로 만들어 전시해놓고, 그걸 보여주면 인민의 삶이 나날이 윤택해지고 있다고 떠들어댄 것이다.

이런 김덕홍의 증언을 어떻게 봐야 할까? 쌍방과실, 그런 게 아닐까? 현대 북한이 망가지는 원인 제공은 아버지 50, 아들녀석 50의 책임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해방 이후 북한의 초기 성공은 인상적이었던 게 분명한 사실이다. 그건 창업주 김일성의 디자인이 맞다. 그걸 이어 받아 인노베이션해야 했을 2세는 자기 역할을 포기했다. 아들이 전략가로서 크게 실격이었던 게 북한의 불행이자, 아버지의 불운이었다.

망명 주도했던 뚝심의 김덕홍에 주목하라

김일성은 마오쩌둥 이상의 독재자였지만, 마오가 가졌던 사람 보는 안목이 없었던 것일까? 그렇게 종이 한 장 차이가 중국과 북한을 갈랐다. 만년의 마오는 미치광이처럼 굴었지만 그래도 덩샤오핑 같은 그룹이 숨 쉴 공간은 마련했다. 그게 중국에겐 축복이었다. “마오는 벌거벗고 온 나라를 돌아다니며 소리치는 임금처럼 행동하고, 신하들은 벌거벗은 옷이 좋다고 박수치는”(벤자민 양 지음 <등소평 평전>, 민음사, 210쪽) 상황이었지만, 덩샤오핑 같은 새로운 피를 제거하진 않았다.

중국과 달리 새로운 피를 몽땅 들어낸 평양은 이내 빈혈증에 휘청댔다. 공동통치자 김정일이 김일성교•주체교의 창시자로 나선 국면에서 여하한의 사회변화, 정치개혁은 원천봉쇄됐다. 그게 북한의 숨통을 마저 끊었다. 그 소식을 재확인해주는 김덕홍의 증언은 의미가 크다. 그 동안 황장엽이란 이름에 가려져있었지만, 망명을 주도했던 것은 외려 그였다는 것도 차제에 기억해둬야 한다.

1939년생인 그는 한국으로 망명을 하기 직전의 직책이 당중앙위원회 자료연구실 부실장이었다. 북한의 숨겨진 공식기록을 모두 열람하면서 차곡차곡 기억해둔 것이 이 책을 쓸 수 있었던 내공인 셈이다. 본디 서문에서 그가 밝혔던 포부는 이 책이 “남북을 아우르는 회고록”이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것에 어느 만큼 근접했는지는 적지 아니 의문이다. 하지만, 현대북한을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증언집이 <나는 자유주의자이다>인 것만은 분명하다.

글/조우석 문화평론가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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