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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청춘들이 '식민지' 윤동주에 열광하는 이유


입력 2016.02.24 09:55 수정 2016.02.24 10:09        김헌식 문화평론가

<김헌식의 문화 꼬기>복간본 시집에서 영화와 공연까지 인기

윤동주 시인을 그린 영화 '동주'의 한 장면 ⓒ루스 이 소니도스

최근에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나 백석의 ‘사슴’ 그리고 윤동주의 시집이 크게 인기를 끌었다. 몇백부 나가기도 힘든 시집이 몇만부씩 나가는 현상은 기이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런 시집들이 많이 나가게 된 이유에 대한 많은 분석들이 있었다.

시가 다시 부활했다는 지적도 많다. 이는 전혀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다. 디카시라든지 SNS 시 등이 크게 눈길을 끌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들은 인터넷 혹은 스마트폰 환경에서 크게 화제가 된 시들이다. 주로 재미와 기발함 그리고 위트가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짧고 일상적인 내용이 사소하기까지 해서 이것을 시 작품이라고 할수 있느냐는 문제제기까지 있었다.

그런 점에 비해 ‘진달래꽃’이나 ‘사슴’,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같은 작품들은 좀 더 고졸한 시의 맛이 더 한 작품들을 담고 있다. 무엇보다 이들 시집은 복각본이기 때문에 인기를 끌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복각본은 말그대로 예전 시집과 똑같이 발행하는 방식이다. 대개 고전을 다시 출판할 경우에는 표지나 안의 편집을 현대의 기호에 맞게 바꾸기 마련이다. 어떻게 보면, 세련되고, 시대를 앞서가는 면도 있다.

복각본은 이러한 트렌드를 정면으로 전복시켰다. 복각본은 원래 초판본의 표지 이미지나 글자체도 같다. 본문에는 심지어 한글과 한자가 그래도 혼용되거나 오늘날과 다른 그당시의 한글표기법을 그대로 발행한다. 대개 다른 책들은 읽기 쉽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본문의 내용들을 현대의 표기법으로 바꾸는 것이 통례인 것과 달랐던 것이다. 독자들에게 더 궁금증을 일으키는 것은 본래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 본래의 모습은 기존의 책에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점에서 원본의 아우라를 복제본으로라도 느껴보고 싶은 독자들의 심리를 복각본이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거꾸로 말하면, 그 복제본 자체를 소장하고 싶거나 그것을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은 희소성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책들을 20대들이 많이 구매한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왜 20대들은 이런 복각본 책들을 구매하는 것일까.

그 가운데 주목해야할 시인이 바로 윤동주이다. 최근에 시집만이 아니라 영화 ‘동주’, 그리고 공연 ‘윤동주, 달을 쏘다’도 큰 성원을 받고 있다. 이런 작품들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윤동주가 오롯하게 20대의 감수성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20대만이 느끼고 생각하게 되는 상황이 공감대를 더 얻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부끄러움을 노래한 시인이라고 한다. 단지 부끄러움만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이 더 울림을 낳는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살았던 엄혹한 시대적 상황 때문에 더 큰 울림을 준다.

윤동주는 식민지 상황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쓰기 위해 노력은 했지만, 부끄러움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사회적 시대적 상황 속에 처해 있었다. 맑고 순수한 20대의 감수성은 물론 그가 살아낸 세월의 모슴들이 지금의 20대가 살고 상황과 멀지 않아 보인다. 사회적 상황이 어렵고 그 상황에서 고민하는 20대의 삶이 불투명할 수록 그것을 투영될 수 있는 것이 윤동주의 시집이고, 그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시 작품들과 삶을 분리 시키지 않고, 윤동주의 시와 삶 전체를 같이 대할 때 20대가 공감하고 동의할 수 있는 점들이 많다. 디지털 시대에 잘 볼 수 없는 아날로그 정서가 그를 다룬 영화나 공연 작품에도 충분히 담겨 있어야 한다. 자신의 삶과 가치를 온전히 지키고 싶은 청춘들의 위기는 앞으로도 계속 될 수 밖에 없고, 그런 점은 윤동주에 대한 선호를 영원히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이러한 점은 결국 시 작품이라는 것이 시인의 삶과 분리되어 존재할 때, 덜 공감대를 갖게 만든다는 점을 생각하게 만든다. 복각본이 화제를 모은 것은 시안의 내용이 아니라 시집 자체가 갖고 있는 아우라의 흔적이었다.

시집이 나왔을 때 그 처음의 모습을 온전히 느끼고 싶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 시대의 아우라가 갖는 관점은 맞으면서도 틀렸다. 복제본이라도 그 아우라의 흔적을 찾으려는 대중심리가 존재한다는 점을 복각본을 통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시 작품에 대한 관심이 부활하고 있다는 지적들도 이런 면에서 맞으면서도 틀렸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시 작품 자체가 아니라 시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사람들의 소망이자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알고 이는 시를 버렸기 때문에 시를 얻은 것이 된다. 시 자체의 형식이나 본질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매개로 어떤 것을 원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적 상황이다.

글/김헌식 문화평론가

김헌식 기자 (codess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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