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보고 바둑둔 이세돌, 알파고 대국 불공정·무가치
<김헌식의 문화 꼬기>과잉 거대 담론 속 특정 기업 만 이득
신선놀음에 기계가 끼어 들어 아우라를 소멸시켰다. 아니 바둑은 스포츠에 속한다. 바둑 국가대표들은 태릉선수촌에 가기도 한다. 스포츠에 인간이 아닌 컴퓨터가 들어왔다. 더구나 처음부터 이번 게임은 불공정했다. 승리해도 의미와 가치를 못찾는 이벤트였다.
서구 이성중심주의 철학의 패러독스에 불과했다. 어떻게보나 성립이 안되는 대국이었지만,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는 프레임에 휘말렸다. 그런 맥락이었기 때문에 예상보다 대국은 폭발적인 반응에 전인류의 위기와 공포감의 발현 무대가 되었다.
알파고는 자신이 바둑을 두고 있는 지 모른다. 더구나 왜 바둑을 두고 있는지 시키는대로 할 뿐이다. 이것이 과연 인간과 필적할 수 있는 인공지능일지 의문이다. 모두 낚였던 이유는 바로 인간이 기계와 바둑을 둘 이유가 없다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기계와 바둑을 두고 싶은 고수는 없다. 바둑은 인간의 게임이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그렇기 때문에 바둑을 두는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도 잊거나 빠뜨리고 판단 행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수라 할지라도 실수를 하거나 잘못 둘 수 있다. 이에 하수에게 지기도 한다. 그것이 게임의 묘미를 주기도 한다.
이런 전복적인 특성 때문에 사람들은 재미있어 한다. 하지만 컴퓨터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 이미 체계화된 시스템안에서 움직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기계와 인간이 게임을 한다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더구나 알파고는 상대방을 복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스미스요원과 같다. 학습에 특화된 빅데이터 기반의 기계와 왜 바둑을 두어야 하는 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은 또한 인간의 자만이다.
바둑은 심리 게임이다. 감정 통제와 그것의 허점 때문에 성립할 수 있다. 그러나 알파고는 이런 원칙을 근본적으로 파괴했다. 바둑을 두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표정과 감정 상태를 파악해서 유리하게 게임을 이끌어 간다. 거꾸로 말하면 사람은 감정을 지니고 있다. 감정은 바둑을 정상적으로 두게 할 수도 있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알파고는 감정이 없다. 알파고는 오로지 연산 작용만을 위해서 존립한다. 물론 그것은 설계자가 만들어 놓은 데로 움직일 뿐이다. 하지만 이세돌은 상대방을 보고 바둑을 두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벽을 보고 바둑을 두는 이세돌에게 대국은 불공정한 게임일 수 밖에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알파고는 엄청난 양의 기보 데이터를 입력했다. 수많은 바둑 기사들이 오랜 동안 만들어 놓은 소중한 진보의 산물이다. 그것이 있기에 알파고가 있을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알파고는 패턴을 읽고 그것을 바탕으로 게임을 이끌어간다.
그러나 이세돌은 그러한 엄청난 양의 빅데이터를 입력한 적이 없다. 그렇게 입력할 수도 없다. 그는 인간의 물리적인 한계 내에서 즉 인간으로서 체험적인 역량을 구축해 놓았다. 하나하나 입력하면서 누적적으로 판단한다. 따라서 바둑을 적용하는 데 다른 맥락이 존재한다. 아니 이미 연산적 계산은 인간보다 슈퍼 컴퓨터가 더 잘한다.
바둑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유희와 재미를 위해 존재했다. 적어도 돈이 개입되어도 바둑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대국은 바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 투자금을 모으기 위한 쇼였다. 그 쇼에 바둑이라는 이름을 넘어 인류와 기계의 대결이라는 거창한 담론으로 뒤덮였다.
만약 인공지능과 인간의 대결이라면, 인간과 같이 정말 바둑을 두어야 한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집어서 올리고 인간과 같이 에너지를 한정되게 사용해야 한다. 물론 인공 지능에 들어가는 에너지도 인간이 공급하는 것이다.
알파고야말로 불공정한 게임의 승자일 수밖에 없다. 반칙 아니 상당한 특혜 속에서 대국을 치렀다. 만약 인간과 같은 조건이라면, 인공지능은 매우 비효율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아직도 갈길은 멀다고 할 수 있으며 몸체를 완전히 쓸 수 있을 때 정당한 대국이 될 것이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인간의 오만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에서 인식해야 할 것은 데카르트의 인간에 대한 정의가 틀렸다는 점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했다. 이는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임을 강조한 근대 철학의 기초가 되었다. 이 때문에 거꾸로 인간이 아닌 존재의 이성이나 지능은 무시하게 되었다. 인간은 이성으로만 존립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비이성이 많다.
만약 이성적인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이 엄청난 충격과 함께 우울함을 가져다 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만이 이성적으로 그러니까 지능이 높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인간이 오로지 이성적인 존재인가. 아니다. 인간은 머리만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온몸으로 존재한다. 또한 공동체속에 있다. 진화는 그것 때문에 가능했다. 도덕과 윤리가 없는 종족은 멸종했다. 휴머니즘이라는 것이 왜 있을 지 생각해 볼 수 있다. 만약 인간이 기계였다면, 인류 문명은 발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핍이 인간답게 했고 인류를 현재까지 있게 했다. 결핍의 부재는 발전의 소멸이다. 더구나 인류의 특징은 협력과 융합이다. 집단 지성의 산물을 구가해왔다. 그런 가운데 집단 지성으로 만든 알파고를 대적하는 이세돌은 혼자였다. 이는 애초부터 주객 전도된 일이었다. 인간의 됨됨이는 단독적인 지능인이 아니라 집단 협력 속에 가치를 지니고 있다. 컴퓨터가 할일은 이미 주어진 인지 능력으로 처리할 수 있는 영역이다.
앞으로 컴퓨터는 더 발달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럴수록 인간다움에 대한 의미와 가치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부각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비인간적이고 기계적인 일들은 이런 인공 지능이 차지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다운 특성이 반영된 일들은 인간의 역할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오로지 수리논리적인 똑똑함만을 강조하고 그렇게 사회질서를 만들어 놓은 이들에게 알파고는 놀라운 충격을 주었지만, 인간다움을 강조한 이들에게 알파고의 등장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차라리 지금부터라도 기계적인 똑똑함을 강조하는 교육을 바꿔야 한다. 인간주의 교육으로 인간다움을 통해 사회를 다시금 구축하는 것이 산업화 되는 인공 지능 시대를 맞이하는 해법이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지향해야할 문화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며, 기능 생산적인 관점의 사회는 종말을 고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서구 이성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동양철학의 기철학적 관점을 다시금 인식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것이 금융자본이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을 위협하는 소멸과 종말의 노정에서 생존하는 길이다.
글/김헌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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