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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오혜영' 흙남성을 흙해영은 쳐다나 볼까?


입력 2016.05.27 09:22 수정 2016.05.27 09:25        김헌식 문화평론가

<김헌식의 문화 꼬기>두 오해영에 비친 우리 시대의 욕망

드라마 ‘또 오해영’에는 ‘내이름은 김삼순’과 달리 두 명의 동명이인이 등장한다. 애써 '내 이름은 김삼순'을 언급하는 이유는 못난이 주인공의 사랑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10년이 훌쩍 넘는 동안 비슷한 포맷의 드라마는 여러 차례 선을 보였는데, 이번에 등장한 ‘또 오해영’은 김삼순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보인다. 두 명의 오해영을 등장시키면서 단순한 스토리라인을 벗어나는 미묘한 흥미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명의 오해영을 통해 극적인 흥미를 자극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같은 이름 때문에 벌어질 일들이 예상되기도 하지만 한 명이 악녀로 등장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빤한 권선징악의 스토리로 흐르지 않아 눈길을 끄는 모양이다.

한 명의 오해영은 평범한 내세울 것은 없는 주인공이다. 다른 오해영은 다른 오해영을 방해하는 욕심많고 잘난 캐릭터로 보인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이러한 절대 구분을 고집하지 않는다. 알고보니 악녀같은 오해영 조차 핍박받고 고통받은 트라우마의 존재였던 것이다. 이는 그동안 악녀의 상대적인 측면을 부각했던 드라마들의 성공사례들의 계보를 잇는 캐릭터 설정이라고 볼 수 있다. 악녀조차 알고 보면 나름의 사연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측면을 부각했던 드라마들은 악녀 열풍을 낳기도 했었다. 이에 대해서는 악녀 캐릭터가 매력적인 점부터 동질감을 느끼는 현대인들의 심리가 투영되었다는 등의 다양한 배경 분석이 있어왔다.

두 명의 오해영은 사실상 하나의 인물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듯 하다. 에초에 두 오해영을 흙수저 금수저 오해영으로 나눌 수 있어 보이지만 사실상 하나의 몸체 안에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흙수저나 금수저는 모두 상대적인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부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자신은 부자라고 하지 않으면서 가난함을 탓라고 끊임없이 부를 탐하는 심리와 비슷할 것이다. 두 오해영이 공감을 얻는 드라마가 인기를 얻는 이유는 시청자들에게도 두 가지 면이 같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흙수저 오해영이 되고 싶은 대상은 금수저 오해영이다. 금해영도 마찬가지다. 갈수록 금수저 오해영도 흙수저 오해영의 한 면을 갖고 있다는 점을 드라마가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욕망이 분화하여 동명이인의 캐릭터가 된 것이다. 이것은 단지 작품 자체의 완성도를 위한 심리학적인 욕망 분석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시청률 확보에서도 효과적이겠다. 금수저 오해영의 입지는 결코 배척의 대상만은 아니다. 그런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이 시청자들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 실제 시청자중에는 그런 존재들도 꽤 있을 것이다.

절대적인 금수저가 아니라는 설정을 할수록 흙수저만 옹호하는 설정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는 시청자를 끌어모을 수가 있다. 그런 면에서는 매우 영리한 설정이라고 할수 있다. 예전처런 김삼순 캐릭터만 옹호하고 부각한다고 해서 시청자의 외연이 넓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금수저가 되고 싶은 사람이나 이미 금수저의 영역에 있는 이들도 드라마는 봐야할 필수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두 오해영이 사실상 한 몸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내적인 캐릭터에만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그 여성이 욕망하는 대상에게도 같다. 욕망하는 남성들은 모두 잘난 금수저들인 듯 싶다. 본래 금수저는 아니어도 성공한 남성들이다. 흙수저 여성은 등장해도 흙수저 남성은 등장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겠다. 흙수저였다고 해도 그 상태로 머물러 있다면 등장할 수도 없는 셈이다. 이런 드라마들을 보면, 흙수저 남성들은 연애나 결혼의 상대자가 될 수 없어 보인다. 가난한 청년들의 고민이야 들여다볼 문제가 아닌 셈이다.

두 명의 오해영은 모두 매력적일 수 있다. 평범하면 평범한대로 잘나면 잘난대로 말이다. 금해영은 악녀라도 그 사연을 아니 더욱 사랑할만하다. 물론 평범하다는 흙해영은 김삼순의 김선아가 평균 이상이었듯이 꽤 괜찮다. 하지만 흙해영 조차 여전히 흙수저인 남성들은 쳐다도 볼 수 없는 셈이다. 그들 주변에는 그런 남성들조차 허용하지 않는 드라마들을 보면 말이다. 박도경이나 한태진 정도는 되어야겠다. 그런 면에서 드라마 '태양의 후예'는 흙수저 남성들에게 희망일 지도 모른다. 최소한 그들은 몸으로 열심히 뛰어 사랑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두 남성에게도 외모 자산은 여전히 있어야 했다.

글/김헌식 문화평론가

김헌식 기자 (codess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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