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식의 문화 꼬기>권력이 있지만 권력이 없는 이중적 위치
요즘 젊은 스타들의 통과의례는 왕세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트렌드가 된 모양이다. 왕세자 역을 했던 청춘 배우들이 곧잘 스타덤에 확실하게 올라섰기 때문이다. 사극하면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던 것과 많이 달라진 지는 분명 꽤 되었다. 그렇다면 사극 속 왕세자 역할이 어떤 요인이 있길래 이런 트렌드를 이루게 된 걸까.
드라마 '해를 품은 달'에서 왕세자 이훤(여진구)은 한 눈에 하연우(김유정)에게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시종 내관이 하연우가 이훤을 생각하는 비율이 점만도 못하다고 말할 정도로 하연우는 이훤을 피하기만 했다. 처음에는 하연우와 가까워지는 것이 힘들었지만, 결국에는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세자빈에 간택되고 무녀가 되는 과정이 파란만장하게 펼쳐지지만, 왕세자 이훤(김수현)은 하연우(한가인)을 계속 사랑한다.
2013년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유아인은 왕세자로 등장해 장옥정(김태희)과 뜨거운 사랑을 불태우는 카리스마 넘친 숙종으로 열연했다. 그 뒤 유아인은 2015년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왕자 이방원으로 등장해 분이와 격동적이고도 애잔한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송중기도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 이도역으로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2016년 '달의 연인 보보경심 려'에서는 고려의 황자 왕소(이준기)가 등장해 해수(아이유)와 사랑을 만들어 가는데 이 왕소가 나중에 고려 광종이 된다. 이 드라마는 타임슬립 방식을 취하고 있다. 고하진이라는 젊은 여성이 고려 시대로 빨려들어가 해수라는 인물로 겪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타임슬립 방식으로 그린 드라마가 2012년 '옥탑방 왕세자'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왕세자 이각이 세자빈을 잃고 300년을 넘어 현대에서 못다 이룬 사랑을 이어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영화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는 주지훈이 왕이 되기 싫어 궁을 떠났던 충녕대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왕세자 연기로 단연 세간의 큰 주목과 신드롬을 일으킨 인물은 드라마 2016년 '구르미 그린 달빛'의 효명세자 박보검(이영)이라고 할 수 있다. 꽃미남 왕세자 이영은 남장 내시 홍라온(김유정)과 로맨스의 주인공이 된다. 많은 시청자들은 박보검의 눈빛만 봐도 흐뭇하고 힐링이 된다는 평가를 내렸다. 응팔의 박보검이 보여준 연기와는 다른 다채로움과 깊이가 감성적으로 마음을 울려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박보검 같은 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중장년층 여성 시청자들도 많았다. 꼭 로맨스의 주인공일 필요 없이흐뭇한 감정을 이끌어내는 왕세자였다.
그렇다면 사극에 왜 왕이 아니라 왕세자가 사극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극이 젊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정통 사극이 아니라 퓨전 사극이 많아진 때문이다. 퓨전 사극은 로맨스 스토리를 강화한 점이 두드러진다. 그렇기 때문에 주요 인물은 사랑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사랑의 주인공으로 등장 하는 인물이 왕이라면 연령대가 높아질 수 있다.
그렇다면 순수하고 애틋한 사랑은 힘들 것이다. 오히려 정치적인 술책이나 암투를 다루는 정통 사극에는 맞을 수 있겠다. 청춘기의 이런 사랑 코드야말로 세대를 뛰어넘어 공통적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를 위해서 공간적 배경은 주로 궁궐이 된다. 본래 사극이 반드시 궁궐이라는 공간일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이것도 역시 퓨전 사극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정치권력의 중심부인 궁궐을 로맨스의 공간으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왕세자는 물론 왕도 사랑의 주인공으로 등장해야 한다.
왕세자는 한편으로 왕과는 다른 입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극적인 재미와 흥미를 유발한다. 일단 그들은 어리다. 이 때문에 아직은 때묻지 않았기에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는 사랑을 추구할 수 있어 보인다. 특정 사회적 조건을 따지지 않으며 아직 순정이 남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감내할 듯한 열정을 지니고 있다. 심지어 자신의 입지가 위험해지고 크게 흔들릴 수 있음에도 희생하고 헌신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런 면은 호감을 넘어 크게 감동을 일으킨다. 영악하지 않고 진정성을 가지고 움직이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이상적인 캐릭터를 선사한다.
또한 그들은 왕은 아니기 때문에 힘이 약하다. 그러므로 주변의 핍박을 받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눈치를 보거나 삼가해야할 일이 많기도 하다. 언제든 쫓겨날 수도 있다. 불안한 위치이기 때문에 왕의 반열인 듯하지만 약자이기에 동정과 감정이입의 능력이 있다. 하지만 전혀 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절대적인 권력은 없지만, 자신이 어떻게 처신하는가에 따라 상대적이 된다. 그러므로 입지와 힘도 상대적이 된다.
그 과정애서 왕세자는 현명하고 능동적이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사랑하는 사람도 지켜 낼 수가 있다. 물론 이러한 태도가 있어도 순수와 진정성을 유지하고 있다. 아울러 왕세자는 다른 왕자들보다 왕이라는 권력적 최고 존재가 될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왕세자 보다는 미래의 군왕이라는 비전이 더욱 호감과 기대감을 갖게 만든다.
그런데 만약 일반 평민과 같은 인물이 박보검의 연기를 그대로 한다면 인기가 있을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왕가의 사람, 미래의 왕이라는 점 때문에 그의 표정은 힐링으로 다가온다. 어떻게 보면 양극화와 격차가 많이 나며 고착화가 진전될수록 절대 계층에 대한 선망은 더 강해질 것이다. 그것이 궁궐 사극이 많아지고 왕세자와 보통 여성의 사랑이야기가 많아지는 이유일 수도 있다. 이미 지금도 평민이나 노비의 삶은 고사하고 이제 양반들의 사랑과 로맨스조차 사극에서 찾아볼 수 없다.
글/김헌식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