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한맛'으로는 승부할 수 없는 시대
"시청률 포기하기 힘들어"
1990년대 후반은 IMF 외환위기로 온 국민이 힘들 때였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엔 실업률이 7%에 달했고, 실업자는 146만명(4월 기준)이나 됐다. 당시 경제 성장률은 -5.1%였다. 회사들이 연이어 부도나면서 처지를 비관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1998년 당시 우리나라 자살자 수는 8569명으로 1997년(6022명)보다 30% 이상 급증했다.
이 시기에 방송한 '칭찬합시다'가 여전히 회자되는 이유는 사회적인 분위기와 연관돼 있다. '김국진 김용만의 21세기 위원회'의 한 코너로 출발한 '칭찬합시다'는 많은 국민이 실의에 빠졌을 때 남모르게 좋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릴레이 형식으로 소개하며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칭찬에 인색한 우리 문화 풍토에서 적극적인 칭찬으로 선행을 독려하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했다.
IMF, 그리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이어 한국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사태로 또 한 번 사회·경제적으로 힘든 국면을 맞았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0년 5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실업률은 4.5%로 통계를 작성한 1999년 이후 최고치다. 실업자 수는 127만8000명이고, 비경제활동인구 가운데 ‘쉬었음’으로 분류된 사람은 228만6000명이다.
이럴 때일수록 공익적인 성격을 띤 예능이 나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주장이 더 크다. 예능 트렌드가 이미 바뀌었고 사회가 점점 팍팍해지며,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는 요즘에는 공익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예능이 부담감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예인을 관찰하는 리얼리티 예능이나 '힐링'을 콘셉트로 한 예능이 주를 이루는 이유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도 메시지를 지키며 정체성을 유지하는 프로그램들이 있지만, 방송사나 제작진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선택이다.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의 김민석 PD는 "최근에는 과거 인기 공익 예능 같은 프로그램이 없긴 하다"며 "채널이 많아지면서 소위 말하는 '순한 맛'만으로는 경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채널끼리 경쟁도 치열해지고, 방송사 입장에서는 시청률을 포기할 순 없다. 제작자들이 확고한 가치관을 가지고 밀어붙이기엔 위험 부담이 있다"고 설명했다.
김 PD는 이어 "'양심냉장고' 같은 공익 예능이 방송됐을 당시에는 채널 자체가 별로 없었다. 메시지를 던지는 예능이 파급력이 컸던 이유다"라며 "'양심냉장고'나 '느낌표' 같은 프로그램은 프로그램의 색깔이 확실한 덕에 더 큰 반향을 일으킨 것 같다"고 짚었다.
공익 예능의 빈자리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프로그램이 메운다. 김 PD는 "이런 류의 프로그램은 주류가 아닐지라도 여러 채널에서 선보이고 있다"며 "공익 예능을 보며 자랐던 세대의 제작자들이 다시 비슷한 예능을 만드는 시대도 올 것이라 본다"고 말했다.
'선을 넘는 녀석들-리턴즈'는 한승훈 PD는 "요즘엔 대놓고 '공익 예능'이라고 하면 시청자 입장에서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며 "대신에 공익적인 성격을 띠면서 재미도 동시에 전달하려 한다. 너무 착한 콘셉트를 내세우면 시청자의 피로도가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 PD는 "지금은 예능 프로그램이 관찰, 힐링 콘셉트로 쏠려 있는데 이 같은 흐름도 언제 바뀔지 모른다"며 "방송사나 시청자 입장에서도 예전 '느낌표'와 비슷한 예능에 대한 갈증은 있기 때문이다"고 분석했다.
'착한 예능'을 바라보는 PD들 역시 고민이 많다.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줘야하기 때문에 적절한 균형감을 맞춰야 한다. 자극적인 맛이 없기 때문에 시청률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한 PD는 "너무 착한 콘셉트를 추구하면 재미없는 게 요즘 예능"이라며 "'선을 넘는 녀석들'에서 역사를 최대한 쉽고 재밌게 알려주는 이유다. 재미와 공익적인 성격을 적절하게 녹이는 과정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전했다.
김 PD는 "요즘처럼 팍팍하고 힘든 상황에서 시청자들이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힐링 예능을 추구하는지, 아니면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예능을 선호하는지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다"며 "다만, 확실한 건 예능은 다큐멘터리가 아니기 때문에 재밌어야 한다. 이건 예능이 사명이다. 일단 재미가 있어야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만한 콘텐츠도 생각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