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봄날은 간다’(2001)의 “라면 먹을래요?” 이후 여자가 남자를 자신의 집에 들인다는 것의 의미는 영화 속에서 또 그를 보는 관객의 해석에서 ‘관계의 진전’ ‘사랑의 시작’으로 고정된 경향이 있다.
무려 18년 뒤,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에서 이종석(차은호 역)과 이나영(강단이 역)이 한집에 사는 상황이 똑같이 해석되지 않게 하려고 극본과 연출이 무던히 애쓴 이유다. 아무리 로맨스는 별책부록이라지만 처음부터 김을 빼고 시작하면 안 되니까, 남자가 여자를 자신의 집에 들이는 상황의 자연스러움을 위해 필연적 설정과 불가피한 상황을 겹겹이 준비했다. 강단이는 차은호의 생명을 구한 은인이고 은호를 친동생처럼 여기고, 차은호는 단이가 이혼한 줄 모르는 상태에서 찜질방을 전전하는 게 안타까워 동거를 제안한다. 경제적 곤경에 처한 유부녀이고 은인인 사람에게 허튼짓하는 건 절정의 배은망덕이라는 전제 아래 은호의 매너를 얹어 로맨스 탄생과 전혀 상관없는 동거인 양 꽁냥꽁냥 한집살이를 시작했다.
지금 보면, ‘이게 말이 돼?’ 할 수 있지만 1998년 감성으로는 말이 되는, 여자가 남자를 자신의 집에 들이는 설정이 ‘미술관 옆 동물원’(감독 이정향, 제작 씨네2000, 배급 시네마서비스)에서 펼쳐진다. 춘희(심은하 분)가 사는 집에 침대며 책상을 두고 급히 이사 간 다혜(송선미 분), 아직 다혜의 집인 줄 알고 늘 그랬듯이 병장 말년휴가를 애인과 보내려 찾아온 철수(이성재 분). 휴대전화 없는 시절, 다혜의 전화를 받아야 한다며 정확히는 ‘나를 잊어 달라’는 다혜의 마음을 얼마 안 되는 휴가 내에 돌려야 한다며 떠나지 않는 철수. 추적추적 비 오는 밤, 고물차 안에서 잠을 청하는 철수가 가엽고 애인에게 차인 게 안쓰러워 “너, 나 여자로 안 보인댔지?”로 선을 그으며 집안으로 들이는 춘희.
1998년에도 현실은 달랐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영화에서는 “너, 나 여자로 안 보인댔지?”로 불안을 달래며 자신의 공간을 내주는 춘희가 있었고, 아직 단념할 수 없는 다혜를 두고 다른 여자에게 허튼짓하지 않는 철수가 있었고, 넓지 않은 집을 반으로 나눠 ‘선을 넘지 않는’ 두 사람이 있었다. 순수했다. 영화를 보는 우리도 한 뼘은 더 순수해졌다.
춘희는 결혼식 비디오를 찍는 기사이고 표밭 다지기 일환으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주례를 서는 지역구 국회의원의 보좌관 설인공(안성기 분)을 짝사랑한다. 결혼식에서 종종 마주치기만 하고 말 한번 제대로 못 건 채 제자리를 맴도는 사랑 중이다. 철수는 자신도 아는 선배와 결혼을 예정하고 있다는 다혜에 대한 배신감인지 미련인지 딱 짚어 말하긴 어렵지만 어떤 감정이 남아 있다. 이렇게는 끝낼 수 없어서 일단 만나기는 해야 한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있다.
두 사람이 다른 곳을 보고 있다는 전제는 춘희와 철수의 경계를 허문다. 거리 두기를 끝낸 두 사람은 남매처럼, 오랜 친구처럼 같이 장도 보고 산책도 하고 옷도 골라 주고 이 닦아라, 세수해라 서로의 연애에 오지랖도 부린다. 두 사람이 다른 이를 좋아한다는 것만 빼면 서로 달라서 더 합이 잘 맞는, 안정감 있게 안착한 연인의 동거다. 끈끈하지 않아서, 질척하지 않아서 더 좋은 연애.
춘희는 밤마다 두꺼운 스프링 노트에 연필로 무언가 긁적이는데 영화 시나리오 공모전에 낼 글이다. 안 그래도 털털하게 입고 수수하게 화장하고 긴 머리 뽀글 퍼머를 해도 예쁘고 대충 묶어도 예쁜 심은하가 독수리타법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는데 말할 수 없이 귀엽게 반짝인다. 춘희의 순수함은 심은하라는 배우를 잊을 수 없게 하는데 큰 몫을 했다. 비디오 촬영이 없는 날이면 밤새 글을 쓰고 아침부터 잠을 자는 춘희, 타자에 능한 철수는 잠자는 춘희 대신 시나리오를 입력해 주는데 사랑 물정 모르고 꿈을 꾸는 춘희에게 자꾸 짜증이 난다. 짜증일까 질투일까.
사실 철수는 다혜에게 차인 특수상황에 더해 ‘너를 여자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듯 투덜거리고 언성 높여 말하는 것을 빼면, 완벽한 ‘이상형’이다. 지저분한 춘희와 달리 깔끔해서 집 안 청소도 잘하고 장 보는 요령도 주부급이고 요리도 잘하고, 춘희가 인공을 만나는 결혼식 지각을 막기 위해 버스도 세워 줄 줄 아는 행동력도 있다. 무엇보다 사랑에 대해 뭣 좀 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이성재는 ‘공공의 적’ ‘홀리데이’로 강한 캐릭터일 수 있겠으나, 1990년대에 청춘을 보낸 이들에겐 훈훈한 매력의 ‘로맨티스트’이다. 드라마 ‘거짓말’에 설렜고 영화 ‘자귀모’ ‘하루’로 따뜻했고, 그래서 드라마 ‘맨도롱 또똣’에서 펼친 중년의 사랑에 공감했다.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은 사랑은 무엇이냐고, 너무 다른 남자와 여자의 사랑은 어느 지점에서 만나야 하느냐고 우리에게 묻는다. 제목부터 주제의식을 선명히 드러낸다. 사랑의 감성과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는 미술관, 사랑의 본능과 체온을 나누는 육체적 교감을 앞세우는 동물원. 춘희와 철수의 사랑으로 보이기도 하고 완벽히 적용될 순 없지만, 일반적으로 여성과 남성을 대표하는 상징으로도 읽힌다. 그래도 다행인 건 미술관과 동물원이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옆’에 있다.
‘미술관 옆 동물원’은 글쓰기와 타이핑의 역분을 버리고 춘희와 철수가 함께 쓰게 된 시나리오의 제목이기도 하다. 미술관에는 다혜가 있고, 그 옆 동물원에는 인공이 있다. 여자주인공 다혜는 다혜를 잘 아는 철수가 그리고, 남자주인공 인공은 인공을 자신과 비슷하다고 여기는 춘희가 그린다. 남녀를 바꿔 투영하니 또 하나의 재미있는 ‘사랑에 관한 탐구’가 이뤄진다. 미술관에서 일하는 다혜는 동물원에서 일하는 인공에게 자꾸만 다가서고, 인공은 묵묵히 제자리에 있다. “지구는 다른 별들의 천국이래요”라고 시적으로 말하는 다혜에게 “지구는 별이 아닙니다, 행성이죠. 스스로 빛을 못 내니까요”라고 답하는 인공. 남녀의 또 다른 차이, 문과와 이과로 흔히 대별 되는 모습이 보인다.
그렇게 영원히 평행일 것 같던 춘희와 철수, 시나리오 속 다혜와 인공에게도 ‘진전’이 이뤄진다. 두 커플은 미술관과 동물원의 갈림길에서 만난다. 내 것, 내 감정만 내세우지 않고 상대의 입장, 상대의 선호를 먼저 생각하며 거리를 좁히고 차이를 줄인다. 흔한 얘기지만 뻔하지 않게 오밀조밀 상상했고 기획했고 완성한 사랑에 관한 탐구 보고서, ‘미술관 옆 동물원’.
순수는 사라지고 자극이 성행하는 시대, 작은 영화는 살아남기 어렵고 대작 영화에 투자가 몰리는 상황에서 제2의 이정향 감독이 쓴 청순 낭만의 시나리오가 관객을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순수 멜로를 보고 자란 ‘덕’은 나이 들수록 체감된다. 다행인 건 넷플릭스, 왓챠 등 인터넷 영상콘텐츠 서비스에 감성이 맑아지는 올드 멜로들이 숱하게 많다는 것이다. 예쁜 척하지 않고 캐릭터와 작품에 몰두해서 더 아름다운 심은하도 실컷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