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영화로, 인생을 예술로 만드는 감독들을 좋아한다. 아녜스 바르다도 그런 감독이다.
1960년을 전후해 시작된 프랑스영화의 ‘새 물결’ 누벨바그 기수 중 한 사람이었고 클로드 샤브롤,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에릭 로메르, 자크 리베트, 루이 말, 앙리 조르즈 클로조, 르네 클레망, 자크 타티 등처럼 영화 주제와 형식에 있어 변화를 꾀하고 보다 개인화된 작법을 보였다. 촬영기사로 시작해 1954년 영화감독으로 데뷔했고, 사진작가나 설치예술가로도 자신의 세상과 사람에 관한 관심을 지속해서 드러냈고 2000년을 전후로 디지털카메라 하나를 가볍게 들고 나가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2015년 제68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우디 앨런(2002), 클린트 이스트우드(2009),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2011) 감독들에 이어 네 번째로 ‘명예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그렇다고 오늘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감독 아녜스 바르다, 수입·배급 ㈜영화사 안다미로, 2000)를 소개하는 이유가 화려한 경력을 지닌 거장의 영화여서는 아니다. 평생을 영화인으로, 예술가로 산 아녜스 바르다의 작품들 가운데 특히나 70세 이후 따뜻하면서도 독립성 강한 품성의 예술인 눈으로 담아낸 다큐멘터리영화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이 중요한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조용하게 질문을 던지는 영화들을 좋아해서다. 젊은 작가나 감독도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인생 메시지를 전하지만, 개인적으로 삶을 충분히 겪은 어른이 담담히 들려주는 얘기를 좋아한다.
영화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마치 자동기술법처럼, 단어와 장면과 생각의 연상작용을 따라 촬영이 이어지고 이야기가 흐른다. 영화는 사전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이삭줍기, 추수 후에 이삭줍는 일. 그 사람들을 이삭줍는 사람들이라 한다. 예전에는 여자만 하던 일로 사전마다 으레 화가 밀레의 ‘이삭줍는 여인들’이 실려 있다”는 감독의 내레이션과 함께. 이삭은 추수 과정에서 떨어진 곡물이나 과일, 채소 따위다. 그다음 장면은 프랑스 파리 오르셰미술관에서 그림 ‘이삭줍는 여인들’의 원화를 보여준다. 그림을 관람하는 사람들. 그리고 다시 바르다의 카메라는 들판으로 나가 사람들의 추억 속 이삭줍기에 관한 역사와 일화를 듣는다. 그다음엔 오늘날, 들판이 아닌 장이 섰다가 진 장터나 쓰레기통을 뒤지는 사람들이 나온다, 랩 음악과 함께.
이런 식으로 장소를 이동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바르다의 카메라는 끝없이 움직이면서 화가 쥘 브레통의 ‘들판에서, 저녁’과 에드몽 에두앙의 그림 ‘상보두앙의 이삭줍는 사람들’을 우리에게로 데려오기도 하고, 추수 후 사과와 포도가 달린 밭을 이웃에게 열어주거나 강풍 후 양식장 곁의 굴 채취를 허락하는 선한 주인들을 소개하기도 하고, 썩어 문드러질지언정 ‘줍기’를 금하는 주인들의 밭도 보여주고, 규격에 맞지 않아 버려지는 어마어마한 양의 감자와 그것들을 줍는 사람들을 따라가 그들의 이력을 듣기도 한다.
생물학 석사까지 따고도 멀쩡한데 버려지는 채소와 빵을 주워 먹고 쉼터에서 살며 문맹의 이웃에게 글을 가르치는 사람, 구직 상태에서 취업을 기다리며 무료급식센터를 돕기 위해 버려지는 감자를 줍는 남자, 쉼터에서 살고 있으니 무료급식을 위해 줍는 게 당연하다며 함께 나선 미혼모를 만날 수 있다. 직업도 있고 사회보장증도 있지만, 쓰레기통을 뒤져 유통기한은 지났으나 식용기간은 남은 음식물로 8년째 식사를 해결하고 있다는 청년은 과소비와 음식물 쓰레기가 부르고 있는 자연환경 파괴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다. 폐기물들을 주워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버려진 물건에 ‘두 번째 삶’을 주는 사람들도 등장한다. 감독 역시 촬영하다 길거리에서 주워온 물건들로 집안을 근사하게 가꾼다.
굳이 영화의 주제를 생각지 않아도 바르다의 카메라에 나를 실어 세상을 두루 보는 것만으로도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너무나 재미있다. 일부러 생각지 않았는데 저절로 여러 가지 삶에 관한 질문을 받고 답을 생각하는 나를 발견한다. 고급 와인을 위해 제대로 익지 못한 포도나 상급이 아닌 포도가 버려지는 일, 레스토랑의 품격에 걸맞게 유통기한이 하루라도 지났거나 얼마 남지 않은 음식들을 버리는 일은 소비자 관점에서 생각하면 반길 일이 된 지 오래다. 적정한 공급과 유통을 통해 적정한 가격을 형성하기 위해 남은 물량을 폐기 처분하는 이들을 탓할 근거는 자본주의 경제에 없다. 문제는 그 자체에 있지 않다. 누군가에는 버려진 채소와 과일, 제품이 오늘을 굶지 않아도 되는 충분한 식재료가 될 수 있다는 것, 과잉과 결핍이 공존하는 것에 가슴 아파하면서도 버려지는 현실이 안타까운 것이다.
오랜 시간 비바람과 따가운 햇볕 속에 채소로서 과일로서 위용을 갖춰도, 인간의 필요에 의해 생산했으면서 또 다른 필요에 의해 용도폐기하는 인간의 이기심. 곡식과 육류, 채소와 과일, 하물며 가공제품을 기왕 인간의 배를 채우기 위해 기르고 만들었다면 그 존재 의의는 다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다. 자연스럽게 나는 과하게 사서 부주의하게 버리고 있는 건 아닌지, 지구 다른 곳의 누군가는 배를 곯을 때 나는 멀쩡하게 먹을 만한 것을 버리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하게 한다.
영화의 원제는 ‘이삭줍는 사람들과 이삭줍는 여자’이다. 이삭줍기가 여성 전담이었던 못난 과거를 상기시킨다기보다는 바르다 자신을 말하는 것으로 읽힌다. 아녜스 바르다가 촬영 대상의 사람들과 똑같이 밭에서 이삭을 줍고 쓰레기통과 장바닥을 뒤지진 않지만, 편집된 영상과 그 내용을 보면 촬영 방식 자체가 이삭을 줍는 행위라고 할 만하다. 먼저 세상이 알곡만 챙기고 거둘 때, 바르다 감독은 바닥에 떨어졌고 버려지기 십상인 사회 구성원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들의 얘기를 세상에 전한다. 또, 촬영 역시 버릴 데 없이, 폐기물이 최대한 생기지 않게 검소하고 알뜰하게 딱 필요한 만큼만 찍는다. 흔히 말하는 세상의 낙오자나 소외된 사람이 버려지지 않게 세상의 중심으로 불러내고, 하물며 디지털 방식으로 촬영하기에 지우고 버리기 쉬움에도 기왕에 태어나고 만들어진 것은 함부로 제외되지 않도록 미리 마음을 써서 찍었다는 게 보인다. 감동을 주는 작업방식이고 존경심이 절로 인다.
영화 내용으로 감동을 주는 감독은 꽤 있지만, 작업에 임하는 태도와 방식으로 존경을 사는 감독은 많지 않고, 있다 해도 작품 위에서 확인되는 감독은 드물다. 그런 귀한 감독이 지금은 세상에 없다. 지난 2019년, 향년 90으로 생을 마감했다. 영화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에서 아녜스 바르다는 자신의 손을 수차례 보여준다. 그중 한 번엔 세어가는 머리카락과 손을 비추며 “내 머리와 손이 끝이 가까워졌음을 일깨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정말 끝을 맞이했다.
사람 아녜스 바르다는 갔을지 모르지만, 감독 아녜스 바르다는 영원하다, 우리가 잊지 않고 그의 작품을 계속해서 보고 생각을 분유 받는다면. 아녜스 바르다는 버려지지 않았다, 많은 이가 ‘아녜스 바르다 줍기’를 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각자 용도 폐기되지 않는 방법, 세상으로부터 버려지지 않는 방법이 있다, 고민해 볼 일이다. 그 전에 타인과 타자부터 쉽게 폐기하지 않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