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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올드무비㊲] 윤여정의 화녀 그리고 충녀…김기영 감독의 페르소나였던 그때


입력 2021.04.05 08:36 수정 2021.04.05 08:36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김기영 감독의 '화녀'와 '충녀'에 연이어 캐스팅 된 배우 윤여정 ⓒ

김기영 감독의 영화 ‘하녀’(1960)는 11년 간격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화녀’(1971)와 ‘화녀′82’(1982)가 세상에 나왔고, 1990년대 ‘악녀’라는 제목으로 제작이 예고됐던 영화는 감독의 작고로 볼 수 없었다. 한 명의 감독이 같은 영화를 시대상 변화에 맞춰 스스로 리메이크하는 풍경은 흔치 않다.


‘타이틀 롤’이라 할 하녀(당시엔 식모 또는 가정부로 칭하던) 역은 이은심에서 윤여정으로, 나영희로 변화했다. 오뚝한 콧날에 묘한 아우라를 풍기는 미모였던 것은 기본, 연기력을 갖춘 배우들이 캐스팅됐다.


기둥 줄거리는 같다. 작곡 등 음악을 하는 남편이 집안에 들인 가정부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 이를 알게 된 아내를 낙태를 감행하고, 한 지붕 아래 기묘한 관계의 동거가 시작된다. 경계하는 아내, 두 여자 사이의 남자, 복수를 도모하는 하녀를 통해 인간의 본능과 욕망의 민낯이 드러난다. 휘몰아치는 전개 속에서 긴장과 공포가 강도를 높여간다.


서울로 향하는 명자와 경희. 명자 역의 윤여정 모습이 싱그럽다. 경희 역의 김주미혜 배우는 '화녀'가 유일한 출연작 ⓒ이상 출처=네이버 블로그 ssrim16

오늘 얘기할 영화 ‘화녀’에서는 하녀 명작 역에 윤여정, 남편 동식 역에 남궁원, 아내 정숙 역에 전계현이 등장한다. 명자는 친구 경희(김주미혜 분)와 겁탈당할 뻔한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한다. 31층 빌딩을 보며 ‘서울에서 살아남자’고 다짐한다. “31층? 떨어져 죽기 좋겠다”는 명자의 말에 깔깔대는 두 사람, 명자의 암울한 미래를 암시하는 듯하다.


직업소개소에 간 두 사람, 경희가 먼저 유흥주점 호스티스의 길을 선택한다. 그때 양계장을 운영하는 사모님 정숙이 들어선다. 집안일도 모자라 닭 뒤치다꺼리도 해야 한다는 정숙의 말에 일자리를 기다리는 아가씨들이 냉소를 퍼붓는다. 이때 자원하는 명자. 월급을 묻는 정숙에게, ‘우리 엄마가 월급 받지 말고 시집 잘 보내 주라고 했다’며 그저 엄마에게 약속의 편지 한 통을 써달라고 한다.


뒤틀어지기 시작하는 삶 ⓒ출처=네이버 영화정보

새롭게 시작된 생활. 명자는 바지런히 집안일을 하고 정숙에게 양계 일도 배운다. 명자에게 맡기고 친정에 다녀온다는 정숙은 한 가지 특명을 내린다. 가수 지망생 혜옥(오영아 분)과 동식의 사이를 뜯어말리라는 것. 명자는 임무를 완수하지만, 그만 혜옥인 것으로 착각한 동식에게 겁탈당한다. 집으로 돌아온 아내 정숙은 “월급도 주지 않는 고마운 아이에게 이 무슨 짓이냐”며 남편을 탓하지만, 동식은 술을 탓한다. 강간과 남편의 외도에 대한 시대의식, 몹쓸 짓을 하고도 싹싹 빌기는커녕 적반하장으로 “당신 혼나야겠다”며 아내에게 당당한 남편의 모습이 지금의 시대상과 거리가 멀다.


급기야 정숙이 우려했던 대로 명자는 임신하고, “아주머니에게 폐를 끼칠 생각은 없다”며 “원하시는 대로 한 뒤 계속해서 식모 일을 하게만 해달라”는 명자를 보며 정숙은 안심한다. 막상 수술대에 누우니 아이에 대한 죄의식과 간절함에 마음을 바꾸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명자는 분함과 복수심에 정숙과 동식의 아이를 해하고, 동식 부부는 자신들의 죄가 드러날까 싶어 경찰에 신고하는 대신 명자의 요구대로 ‘첩’ 대우를 하기로 한다.


되돌리기에는 늦은… ⓒ출처=DAUM 영화정보

시작할 때의 마음이 지속하기란 어렵다. 욕망을 바탕으로 한 사랑의 본질에 독점력이 있기도 하거니와 울며 겨자 먹기로 남편을 내주고 첩 행세를 하는 것이다 보니 갈등과 충돌은 필연이다. 중간에 선 남자 또한 자신의 잘못으로 집안이 풍비박산 나다 보니 심적 괴로움이 크다. 연이은 살인, 내 것을 지키려는 본능이 뒤얽히며 영화는 핏빛 공포에 휩싸인다. 누구도 승자가 없는 비극적 결말을 향해 속도감 있게 달려간다.


김기영 감독은 스토리 전달에 급급하지 않는다. 그러한 일이 벌어지게 된 배경과 폭발력을 키우는 인간의 욕망을 파고들어 적나라하게 펼쳐 보인다. 무서운 건 명자 손에 들린 검은 쥐가 아니라 인간의 이기적 욕심과 한계를 모르는 욕망이다.


CG는 없다. '화녀'의 검은 쥐, '충녀'에선 흰쥐. 여기까지가 '화녀' 스틸컷 ⓒ출처=네이버 블로그 ssrim16

김기영 감독의 아들 동원 씨는 후일 ‘화녀’에 등장하는 검은 쥐는 흰쥐에 색을 칠한 것이라고 전했다. 흰쥐 열댓 마리를 키우고 영화에 등장시키려 훈련도 시켰는데, 촬영이 끝난 후 뛰어난 번식력으로 엄청나게 불어나 잠자는 이불 속에 들어오기도 해서 엄청난 골칫거리였다고 회상했다.


흰쥐는 이듬해 개봉한 영화 ‘충녀’에 등장한다. 동식의 딸(김주미 분)이 투명한 유리 속에 두 마리를 키우기 시작하는데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고, 명자의 집에 침입한다. 심지어 침대에 누워 있는 명자에게 쏟아진다. 컴퓨터 그래픽이 없던 시절, 온몸으로 쥐 세례를 감내해야 했을 배우 윤여정의 고충이 절감된다.


‘화녀’의 고생만으로도 충분해 몇 차례나 ‘충녀’를 고사했건만 애초 윤여정을 모델로 집필된 시나리오다 보니 설득 끝에 출연했고 다시금, 생고생한 것. “나는 고생하는 영화 싫다”면서도 뻔한 영화와 캐릭터를 피해 흔치 않은 작품을 택하는 안목, 작품만 좋으면 내 돈을 써가면서라도 영화를 완성해 가는(역시나 ‘미나리’에서도) 예술인 윤여정이다.


영화 '충녀' 포스터. 제목 글자가 벌레를 연상시킨다 ⓒ출처=DAUM 영화정보

‘충녀’는 ‘하녀’의 리메이크작이 아니다. ‘화녀’의 스핀오프(원작 영화나 드라마를 바탕으로 새롭게 파생되어 나온 작품)로 볼 수 있겠는데, 등장인물이 똑같은 게 흥미롭다. 동식, 정숙, 명자의 삼각관계도 같고 배우도 동일하다. 동시에, 동식과 정숙의 자녀가 ‘화녀’로부터 1년 새 훌쩍 자라 성인이 된 것을 생각하면, 1960년 작 ‘하녀’로부터 11년이 흐른 뒤를 상정한 ‘하녀’의 스핀오프로도 읽힌다.


‘하녀’ 리메이크 영화들과 ‘충녀’의 가장 큰 차이는 명자가 정숙의 집에 하녀로 들어온 적이 없다는 것이다. 명자는 가난한 집의 생계와 대학생 오빠의 등록금을 위해 어머니에게 떠밀리다시피 서울로 몸을 팔러 왔다. 아들 선호사상의 끝을 보여주는 어머니인데, 영화 안 내러티브에서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술집 여급을 시작하자마자 사장(박정자 분)과 또 다른 호스티스(사미자 분)의 주도 아래 동식에게 겁탈을 당하는 명자. 명자는 바로 동식에게 아내의 대우를 요구하고, 동식은 아내에게 상의한다.


지금으로서는 어리둥절한 50년 전 상황이 펼쳐지는 가운데, 남편의 성불구를 고친다는 미명하 아내 정숙은 아예 다른 집을 얻어 명자와 동식에게 살림을 차려준다. 반드시 자정까지는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조건을 달아 생활비 조의 월급까지 명자에게 제공한다. 허약한 몸으로 삯바느질을 하던 ‘하녀’ 속 아내와 비교하면, 사회적 활동은 왕성해졌으나 가정 내 지위는 여전히 조선의 칠거지악에 묶여 있는 모습이다.


명자에게 '두 집 살림'의 규칙을 설명하는 정숙 ⓒ출처=DAUM 영화정보

거주지도 다르고, 사모님과 하녀의 수직관계도 아니다 보니 정숙과 명자의 대결 양상은 ‘하녀’나 ‘화녀’에는 비할 수 없이 뜨겁고 험악하다. 한 남자를 두고 하루 24시간을 반으로 나눠 12시간씩 점유하고 ‘자신의 시간’을 뺏기지 않으려 갖은 방법을 동원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한 편의 풍자 코미디다. 김기영 감독은 우리를 ‘크크큭’ 웃게 하다 스릴러로 장르를 바꾼다. 그 격차가 커서 더욱 무섭다. 물질을 좇고 체면을 중시하는 인간들의 추악한 욕망을 치정극으로 다루지 않고 스릴러 영화로 풀어낸다. 더할 나위 없이 시대를 앞서간 현대적이고 세련된 연출 방식이다.


앞서 말했듯 정숙의 딸이 키우는 흰쥐들이 명자의 집으로 간다. 흰쥐의 전혀 다른 공간으로의 이동, 판타지(환상)이다. ‘화녀’에서 정숙이 낳은 신생아가 ‘충녀’의 명자 집에서 보인다. 이 또한 공포감 넘치는 환상이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고 무섭지 않을 수 없다. 김기영 감독을 서스펜스의 대가 히치콕 감독에 비유하는 이유, ‘충녀’만 봐도 확인된다.


현실인듯 꿈인듯 서 있는 '충녀' 명자. 김기영 감독의 영화에는 시계가 많이 등장, 공포의 밀도를 높인다. ⓒ출처=DAUM 영화정보

김기영 감독의 연출, 남궁원과 전계현을 비롯한 배우들의 호연, 모두 중요하지만 ‘화녀’와 ‘충녀’에서 바로 그 화녀와 충녀의 역할은 매우 크다. 그들은 온몸을 던져 긴장과 공포를 만드는 가해적 인물이자 가혹한 운명의 수레바퀴에 짓이겨지는 피해자다. 김기영 감독은 생전에 하녀 역의 여러 배우 가운데 특히나 윤여정 배우를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독특한 분위기의 외모, 그로테스크한 목소리를 아꼈단다.


TV 안방극장에서 활약하던 배우 윤여정의 스크린 데뷔작 ‘화녀’를 앞두고, 김기영 감독이 출연 조건을 하나 걸었단다. 3개월 동안 자신과 만날 것. 윤여정 배우는 의아했지만 ‘영화는 처음이라’ 수용했는데, 촬영이 시작되자 김기영 감독은 그 사전 미팅에서 보았던 표정과 말투를 요구하더란다. 배우의 연기 디렉션을 지독히도 면밀하게 준비하는 감독, 그게 무엇인지를 알아듣고 표현해내는 배우. 그 감독에 그 배우다.


그 덕에 우리는 윗니로 아랫입술을 깨무는 듯한 미소를 비롯해 윤여정이 지닌 자연스러운 매력과 독특한 표정을 영화에서 보게 됐다. ‘패셔니스타’다운 감각적이고 사랑스러운 의상, 젊은 날의 윤여정을 만나는 즐거움도 ‘화녀’와 ‘충녀’를 봐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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