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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도 졸고, 피고도 조는 '양승태 재판'…이유 들어보니


입력 2021.04.24 05:00 수정 2021.04.24 10:06        안덕관 기자 (adk@dailian.co.kr) 김효숙 기자 (ssook@dailian.co.kr)

바뀐 재판부 공판갱신 절차…'증언 녹음파일' 청취만 16차례

법조계 "증거조사 안 된 경우 말고 녹음본 재생은 전례없어…특별대우"

"법과 원칙에 위배되지 않아…사건 특수성 감안하면 가능한 조처"

변호인 "평면적으로 적힌 글과 감정 담긴 목소리는 달라…재판부 이해 돕는것"

양승태 전 대법원장. ⓒ데일리안 류영주 기자

23일 오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1부 심리로 열린 129차 공판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피고석에 앉자마자 눈을 감았다. 피고의 출석을 확인하는 인정신문 때를 제외하고는 눈뜬 모습을 좀처럼 볼 수 없었다.


함께 기소된 박병대, 고영한 전 대법관 등도 눈을 감았다. 판사들도 반 쯤 감긴 눈으로 노트북만 바라봤고, 서기들도 타자에서 손을 뗐다. 법정에선 지난 증인신문 때 녹음된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의 목소리만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은 재판부 전원이 교체된 탓에 재판 일정에 차질을 빚고 있다. 지난 2년간 이미 120회 이상 재판이 열렸는데 당시 증인들의 증언 녹취록을 다시 듣는 방식으로 공판 갱신 절차를 밟고 있는 것이다.


재판부가 바뀌면 마땅히 거쳐야 하는 절차지만, 일반 피고인을 상대로는 이 과정을 약식으로 처리하고 심리에 돌입하는 경우가 많아 법조계 일각에선 '전관예우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된다.


이 같은 상황은 양 전 대법원장 측이 "증인신문을 새 재판부가 모두 들어봐야만 한다"고 요청하면서 발생했다. 검찰은 시간이 너무 소요된다는 이유로 반발했지만,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 측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16차례 공판에 걸쳐 이규진 전 상임위원,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한승 전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장, 강형주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 4명의 증언 녹음이 재생되는 상황이다.


일부 법조계 관계자들은 과거의 재판을 녹음파일로 복기하는 것은 이례적이면서도 비효율적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대법원 형사소송규칙(144조 1항 5호)에 따르면 바뀐 재판부는 심증을 형성하기 위해 증거조사를 다시 해야 하지만, '신속한 공판' 이념에 따라 새 재판부는 이미 정리된 기록을 확인해 이를 간략하게 넘기기도 한다는 것이다. 모든 피고인에게 양 전 대법원장 사례를 대입하면 그 어떤 재판도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잇따랐다.


참여연대 소속 김남근 변호사는 "양 전 대법원장이라서 받는 특별대우일 것"이라며 "일반 피고인들이 증인의 녹음파일 재생을 신청하면 재판부는 묵살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 변호사는 이어 "통상적으로 녹취본과 실제가 다른 정도의 심각한 문제가 발견되지 않는 한 재판부는 녹음 재생을 허용하지 않는다"며 "양 전 대법원장 측은 바뀐 재판부가 녹취본만 읽어보고 사건을 판단하는데 오해가 발생할 것이라 우려해서 그랬겠지만 그런 불안감은 모든 피고인도 느낀다"고 꼬집었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도 "극히 비효율적이다. 공판절차 갱신에서 녹음 청취를 요청한 사례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며 "재판부도 정 녹음파일 듣고 싶으면 판사실에 가서 들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이어 "이 상황은 공판 절차 갱신이 아니라 공판 절차 재연이나 마찬가지"라며 "양 전 대법원장쯤 되니 재판부도 물러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영한 전 대법관(왼쪽)과 박병대 전 대법관. ⓒ데일리안

하지만 또다른 한편에선 사건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양 전 대법원장 측의 요청은 정당하다는 반론도 나온다. 일단 양 전 대법원장 측의 요청은 원칙적으로 문제가 없고 재판기록이 20만장에 달하는 만큼 일반적인 사건과 비교하는 것은 부적절 하다는 것이다.


사건에 얽힌 정치적인 성격과 수많은 쟁점을 감안하면 새 재판부가 반드시 증언 녹음을 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한 전직 부장판사는 "지금까지는 약식으로 진행하던 절차를 원칙에 입각해 진행하는 것이므로 녹음파일을 왜 듣느냐고 비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며 "게다가 이번 사건은 민감하고 사안이 중대해서 나중에 피고인 측이 공판 절차 갱신이 제대로 안 됐다고 이의를 제기하면 재판부는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또 전 서울 남부지검 검사장인 고영주 변호사는 "특별대우라고 보기는 어렵다. 변호인 측은 방어권 보장을 위해 원칙대로 재판을 하는 것"이라며 "그런데다 양 전 대법원장이 불구속 상태인 만큼 굳이 재판을 빨리 진행시킬 이유도 없다"고 주장했다.


고 변호사는 이어 "정권의 압력이 줄어드는 올해 말에 유리한 선고가 나오도록 하려는 변호인 측의 지연 전략일 수는 있다"며 "어쨌든 법리에 위배되지 않는 만큼 비난할 여지는 없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양 전 대법원장 변호인 측은 공판 절차 갱신이 비효율적으로 진행된다는 지적에 "오히려 반대다. 새 재판부가 방대한 기록을 효율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증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게 하는 것"이라며 "기록에 평면적으로 적힌 글과 실제 감정을 담아 변론한 목소리는 재판부가 듣기에 다를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됐다"고 주장했다.

안덕관 기자 (ad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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