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는 뤼순 법정에서 자신은 ‘대한국의군참모중장’이니, 만국공법에 따라 포로로 대우해줄 것을 요구했다. 다만, 여기서 안중근 의사가 요구한 것은 전시법에 따라 재판을 면제하여 무죄 석방해 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대한인으로서 의당 대한제국의 안녕에 위해를 끼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이니 그 행위의 당위성 그 자체를 인정해달라는 의미였다. 국민이 자국의 안녕을 위해 타국의 압제에 저항한 것은 당연한 권리였기에 일본 판사조차 판결문에서 “피고가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행위야말로 그 결의가 사적 원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라고 하며 공적 행위라는 것을 일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생존을 위한 저항은 당연한 것이기에 재판은 안중근 의사의 정당성을 더욱 공고히 하는 무대가 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일본은 안중근 의사 스스로 죄를 자백하도록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첫 번째는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모른다는 것과 두 번째는 안 의사가 쏜 총탄이 국제법에서 금지한 무기라는 점이었다. 이 두 가지 조건을 일본이 입증할 경우 안중근 의사를 불특정 다수에게 국제법상 금지된 무기를 난사한 형사범으로 몰아갈 수 있었다.
만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모른 채 마구잡이로 총을 난사한 것이라면 분명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안중근 의사는 여러 차례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을 언급하였고, 이러한 죄상 때문에 대한국인으로서 이토 히로부미 척결의 당위성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척결 대상인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도 모르는 상태에서 단순히 짐작만으로 누군가를 사살한다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일본 검사는 안중근 의사에게 이토 히로부미를 알고 쏘았는지 집요하게 묻기 시작했다.
첫 심문 당시 일본 검사는 먼저 어떻게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오는 것을 알았는지 물었다. 이에 대해 안중근 의사는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답변했다. 검사는 이토 히로부미의 용모를 알고 있는지도 물었다. 안중근 의사는 이 역시 신문을 보고 이토 히로부미의 용모를 알았다고 답변했다. 일본 검사는 안중근 의사의 답변에 그렇다면 이토 히로부미의 용모상 특징이 무엇인지 물었다. 안중근 의사는 ‘수염 등의 모양으로 알았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이 문답에는 중요한 사실이 누락되어 있다. 안중근 의사는 “나는 일등대합실 출입구에서 플랫폼으로 나갔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저쪽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므로 나는 러시아 병대의 후방에 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 앞을 통과하였을 때 병대 틈으로부터 저격했다”고 했다. 즉 이토 히로부미의 사열 광경을 계속 주시했다는 것이 된다. 이런 과정이라면 누구라도 이 사열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파악할 수 있다. 만일 무턱대고 무차별적으로 사격을 했다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처음 지나쳤을 때 후방에서 사격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일본 검사 역시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왜 측방에서 팔의 상박을 향해 사격했는지 질문했다. 왜냐하면 측방에 팔의 상박을 향해 사격하여 명중할 경우 총탄이 이토 히로부미의 몸을 관통할 가능성이 거의 없어 치명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더욱 높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의사는 유도 질문에 넘어가지 않고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할 기회가 되었기에 사격하였다고 일관되게 답변했다. 이것은 의거 당시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누구인지 명확히 알고 사격했다는 의미였다.
두 번째 심문에서 일본 검사는 안중근 의사에게 탄환 끝에 십자로 홈을 직접 만들었는지 물었다. 이 질문은 두 가지 의도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흔히 ‘덤덤탄’이라고 불리는 이 탄환은 팽창형 탄환으로 국제법상 전시에도 사용이 금지된 무기에 속하였고, 두 번째는 팽창형 탄환을 사용한다는 것은 상대에게 필요 이상의 고통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안중근 의사를 흉악범으로 몰아갈 수 있는 결정적 근거가 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검사는 이에 대해서 여러 차례 질문했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는 총은 작년에 샀고, 탄환의 십자형 홈은 누가 만들었는지 모른다고 답변했다. 이에 일본 검사는 그 홈이 탄환을 압수할 당시에도 번쩍이고 있었고, 놋쇠 역시 녹이 슬지 않아 최근까지 관리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것은 안중근 의사의 진술대로 작년에 산 그대로 보관한 것이라면 그 상태가 좋게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는 일관되게 “나는 산대로 가지고 있었다”라고 답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검사는 재차 동일한 질문을 했다. “깊이 깎이어 있는 탄환의 납이 번쩍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최근에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고 안중근 의사를 추궁했다. 이에 안중근 의사는 “나는 전혀 그것에 대해 모른다”고 답변했다. 결국 일본 검사는 본심을 드러냈다. 탄환 끝에 이같이 상처를 내면 저격을 받는 자의 상처가 심해지는 것을 알고 있는지 물었다. 이에 대해서도 안중근 의사는 “모른다”고 답변했다. 탄환의 십자 홈은 세 번째 심문에서도 재차 확인할 정도로 중요한 사안이었다.
사실 이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흔히 우리는 안중근 의사가 사용한 총에 집중하지만, 일본은 총 그 자체보다 안중근 의사의 유죄를 입증하는 더 중요한 근거는 탄환에 새겨진 십자선이었다. 일본은 증거 물품 중 탄환의 십자선을 강조하여 촬영했다.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자칫 우리 역시 오해할 수 있다. 안중근 의사는 만국공법에 따라 포로로 취급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시에 사용해서는 안 되는 무기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쟁 범죄로 취급될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여기서 두 가지 사안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중 하나는 안중근의 만국공법이며, 다른 하나는 안중근이 사용한 탄환이다. 사실 안중근 의사를 ‘의병’이나 ‘파르티잔’으로서 생존을 위해 대한제국의 안녕에 위해를 가하려는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하려는 것만으로 바라본다면 그가 사용한 탄환의 십자선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히려 덤덤탄이 만들어진 이유 즉, 낮은 살상력을 보강한다는 측면에서 합목적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안중근 의사가 언급한 만국공법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마 교황 앞에서 한·중·일 삼국의 황제가 평화를 논의하자”는 주장, 그의 종교가 가톨릭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추측건대 안중근 의사는 가톨릭적 교리를 만국공법으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높다. 덤덤탄을 금지한 1899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결의 내용까지 안중근 의사가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안중근 의사는 대한국인 ‘의병’이자 ‘파르티잔’이고, ‘정규군’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안중근 의사를 ‘장군’이라고 부르고 싶은 건 왠지 안중근 의사를 1899년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서 합의된 육전규칙까지도 알고 있는 ‘초월적 존재’로 여기기 때문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제는 우리가 보고 싶은 영웅 안중근이 아닌, 대한인 의사 안중근을 제대로 바라봐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