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드라마가 끝나면 배우진과 제작진 등의 역할과 이름이 보통 화면 위로 올라간다.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애쓴 모든 이의 노고를 기록하고 기억하려는 자막이다.
지난달 19일 막을 올린 뮤지컬 ‘스윙 데이즈_암호명 A’의 무대에는 특별한 엔딩이 펼쳐졌다. 여느 연극이나 뮤지컬처럼 이야기가 막을 내린 뒤 단역부터 조연, 주연까지 순차적으로 나와 관객의 박수갈채를 받았고 배우들은 고개 숙여 환호에 화답했다.
바로 그때 무대에 선 배우들 뒤로, 무대에 드리운 배경 벽 위로 이름이 띄워졌다. 무대에 선 순서와 자리 위치에 맞춰, ‘↓ 이 배우’의 이름을 콕 짚어 알려주었다.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미리 오늘의 출연진을 확인하고 온 관객이라고 해도 팬이 아니고서는 주·조연 네댓 명 외 배우들의 이름을 외우지 못하기 십상이다. 엔드 크레딧을 띄워 주었다고 바로 모든 출연 배우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는 건 아니지만, 대사 없어도 열정적으로 춤추고 노래했던 배우들의 이름이 새겨지니 뜻깊고 관심 갔던 배우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어 좋다.
무대 뒤에 서기를 자청하거나 각오하고 제작 스태프가 된 이들과 달리 배우라는 직업은 본인의 얼굴과 몸짓을 대중 앞에 보이고 알리려는 사람들이다. 연출자를 비롯해 제작진이 마음으로 마련한 엔드 크레딧이 배우들에게는, 특히나 단역 배우들에게는 결코 작은 기쁨이 아니다.
확산하면 좋겠다 싶은 선례를 뮤지컬 ‘스윙 데이즈_암호명 A’이 보여주었다.
모든 출연 배우의 이름을 시각적으로 소개하는 커튼콜 덕분에 갈등과 번민의 공감을 자아내다 인생 마지막에 본인의 표현을 빌자면 ‘나쁘지 않은 선택’을 한 야스오 역의 배우 이창용, 카리스마와 압도적 가창력을 보여준 베로니카 역의 전나영, 맑은 미성을 지닌 호메리 역의 최현주, 밝고 희망찬 노래를 부른 노아 역의 이은상, 여유와 관록을 느끼게 하는 펄벅 역의 오진영에 더해 에너지 넘치는 댄스와 합창으로 쉴 틈 없는 즐거움을 준 앙상블 배우들, 남자 주연들의 아역을 맡은 어린이 배우들의 이름을 눈여겨보았다.
엔드 크레딧이 없었다면 주로 영화를 담당해온 이력 탓에 우선은 신성록, 하도권, 장현성처럼 무대와 안방·스크린을 오가는 배우들의 이름만 아는 커튼콜이 됐을 것이다(이상 12월 4일 관람 기준). 뮤지컬 열혈 팬이 아닌 관람객 역시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배우들에 시선이 머무르기 쉬울 터이다.
공연의 여운을 안고 로비로 나와 ‘오늘의 출연진’을 다시금 차근히 살피는 기회도 준다. 남정현, 김혜미, 송정은, 임창영, 전찬욱, 추성욱, 정대산, 신새연, 신재현, 김해운, 정서안, 위예경, 송창근, 권성찬, 이상원, 최은총, 이윤아, 이준원, 강윤성과 같은 앙상블 배우들, 정해진 배역 없이 배우의 빈 자리를 메워 모든 역할을 소화하는 스윙 배우들인 안지현, 이충근, 성웅진 그리고 어린이 배우 최지훈, 김도현, 여민혁의 이름도 평소보다 크게 보인다.
뮤지컬 ‘스윙 데이즈_암호명 A’의 부제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아름다운 선택’이다. 제약회사 유한양행의 창업자로 기업의 목표를 이윤 추구에 두지 않고 사회 환원에 두어 이미 존경받던 유일한(극중 인물 유일형, 유쥰상·신성록·민우혁 공동 캐스팅)이 뒤늦은 나이에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국제무대에서 암약한 미국전략사무국(OSS) 요원이 되는 과정을 그린다.
1940년대 미국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OSS가 한국인 19명을 한반도에 비밀 투입했던 특수작전 ‘냅코 프로젝트’. 직위도 이름도 없이 단지 A, B, C, D로 불리기에 아무런 명예도 보상에 대한 기대조차 불가능했으나 하나뿐인 ‘생명’을 걸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약했던 첩보원들의 실화가 자못 감동적이다. ‘스윙 데이즈_암호명 A’는 극의 말미에 19명 모두가 사망한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그들의 활동과 신분이 공개됐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아름다운 선택을 널리 알리는 뮤지컬이어서일까, ‘스윙 데이즈_암호명 A’(작가 김희재, 작곡 제이슨 하울랜드, 각색·작사 박해림, 연출 김태형, 제작 올댓스토리·컴퍼니 연작)는 뮤지컬에 ‘엔드 크레딧’이라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선택을 선보였다. 공연은 새해 2월 9일까지 서울 퇴계로 충무아트센터에서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