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계약 첫 날 기록, 투싼 5000대 이상 앞서
주요 볼륨 차급서 현대차에 우위…'디자인 기아' 과시
기아의 준중형 SUV 스포티지가 정식 출시 전부터 역대 동급 최다 사전계약 실적을 올리며 시장 지배자 자리를 예약했다. 현대자동차의 형제차 투싼을 압도하는 인기를 보이면서 기존 K5, 쏘렌토의 뒤를 이어 ‘현대차 킬러’로 자리 잡을지 관심이다.
11일 업계에 따르면 스포티지 5세대 모델은 사전계약 첫 날인 지난 6일 하루 동안만 1만6078대가 계약됐다. 이는 4세대 쏘렌토(1만8941대)에 이어 국내 SUV로는 역대 두 번째 기록이자 준중형 SUV 부문에서 최고 수치다.
기존 준중형 SUV 사전계약 첫날 최고 기록은 현대차 4세대 투싼이 지난해 9월 기록한 1만842대다. 스포티지는 이보다 50%가량 많은, 대수로는 5000대 이상 많은 물량으로 투싼을 압도했다.
투 차종 모두 출시 초기에는 하이브리드 모델을 뺀 상태에서 가솔린 터보와 디젤 모델만을 놓고 사전계약을 진행해 조건도 동일하다.
쏘나타, 싼타페 이어 투싼까지?…볼륨 차급 왕좌 잇달아 내주는 현대차
그동안 주요 볼륨 세그먼트(수요가 많은 차급)에서 기아에 1위 자리를 하나씩 넘겨준 현대차로서는 스포티지의 기세가 부담이다.
중형 세단의 전통적 강자였던 현대차 쏘나타는 지난해부터 기아 K5에 자리를 내준 상태다. 지난해 K5가 8만4550대나 팔리는 동안 쏘나타는 6만7440대의 실적에 그쳤다. 심지어 쏘나타 재고가 쌓이면서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아산공장 가동을 멈추는 굴욕까지 겪었다.
올해 역시 상반기까지 3만6345대가 팔린 K5에 비해 쏘나타(3만2357)의 실적이 저조했다. 그나마 파격 할인 프로모션과 디자인 개선(터보모델 디자인 확대적용) 등을 통해 판매실적을 끌어올렸지만 K5를 넘어서기엔 역부족이었다.
중형 SUV 대표모델로 불리던 현대차 싼타페 역시 기아 쏘렌토에 속절없이 밀리고 있다. 올해 6개월간 판매량은 쏘렌토 3만9974대, 싼타페 2만1723대로 거의 더블 스코어다.
소형 SUV 시장에서도 올해 상반기 기아 셀토스(2만1952대)가 현대차 코나(7697대)를 압도했다. 현대차는 미니밴 시장의 맹주 기아 카니발을 잡기 위해 ‘짐차’ 스타렉스를 포기하고 고급화한 스타리아를 출시했지만 여전히 역부족이다. 올해 6개월간 카니발이 4만6294대 팔리는 사이 현대차는 스타렉스와 스타리아를 합쳐 1만5000대도 못 팔았다.
이런 상황에서 준중형 SUV까지 밀린다면 현대차로서는 체면이 크게 상할 일이다. 비록 소형 SUV에 밀려 예전만은 못하지만 준중형 SUV 차급은 여전히 월 5000대 이상을 바라볼 수 있는 만만찮은 시장을 갖고 있다.
신형 투싼은 지난해 하이브리드 모델 판매가 본격적으로 이뤄진 11월부터 두 달간 7000대 내외의 판매실적을 올렸었다. 올해 역시 상반기 2만8391대를 판매하며 월평균 5000대에 육박하는 물량을 유지하고 있다.
스포티지는 구형 모델 노후화로 올 6개월간 월평균 1000대 내외의 판매실적에 머물렀지만 5세대 신형 판매가 본격화되는 8월부터는 판도가 달라질 수 있다. 시장 파이를 늘리는 게 아니라 투싼의 물량을 가져가는 제로섬 게임이라면 현대차에게는 타격이 크다.
현대차 SUV 최초로 파라메트릭 다이나믹스 디자인을 적용한 상징적 모델인 투싼이 기아의 동급 차종에 밀린다면 현대차의 디자인적 자부심도 흔들릴 수 있다.
가뜩이나 쏘나타와 싼타페가 K5·쏘렌토에 밀리며 디자인적 논란이 일었는데 투싼까지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논란은 더 확산될 수 있다.
현대차와 기아의 동급 차종은 플랫폼과 다수의 부품을 공유하고, 파워트레인 구성을 포함한 대부분의 제원과 상품성이 거의 동일하다. 이런 상태에서 브랜드파워에서 앞서는 현대차의 차종이 판매실적에서 밀린다는 건 디자인의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다만 미래지향적이고 실험적인 디자인을 추구하는 현대차와 상대적으로 대중이 받아들이기에 무리 없는 디자인을 적용하는 기아의 특성을 단지 국내 시장에서의 실적만으로 놓고 평가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쏘나타의 경우 미국 시장에서는 개성이 뚜렷한 디자인이라는 평가와 함께 K5보다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현대차 디자인은 국내 뿐 아니라 글로벌 시장을 타깃으로 미래지향적인 이미지를 어필하는 데 중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면서 “국내에서의 단기적 실적만으로 큰 방향성을 수정할 필요까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