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영화 속 사랑하는 이들을 보노라면 젊으나 늙으나 이성이든 동성이든 고갱이의 본질도 겉으로 드러나는 행태도 매우 흡사하다. 사랑은 원형을 반복한다는 말이 한 사람의 사랑 방식은 상대가 바뀌어도 같다는 말인 줄 알았는데, 모두의 사랑에 적용되는 것이었나 보다.
이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2005)은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고 히스 레저를 추억하기 좋은 영화다. 불후의 명연기를 남긴 ‘다크 나이트’(2008)와 밥 딜런의 카리스마를 연기한 ‘아임 낫 데어’(2007)는 물론이고,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1999)에서 보여준 풋풋한 훈남의 모습도 너무 좋다. 그 외의 출연작들 모두, 마치 서른도 못 돼 일찍 떠날 걸 미리 알았던 듯 다양한 캐릭터를 선물했다.
그러함에도 ‘브로크백 마운틴’을 꼽는 건 신인으로서의 시기가 한참 지났음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모습을 꺼내던 열정 덕에 여전히 배우로서 신선하고, 더욱 깊어진 연기 덕에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순순히 용인되지 않는 관계에 대해 그 순간만큼은 모든 걸 잊고 그들의 외로운 사랑에 공감하도록 하는 힘이 있어서다. 그가 살아있다면 40대의 모습이 저랬을까 싶은, 중년의 히스 레저를 만나는 감회도 남다르다.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한 적 있다. 히스 레저와 제이크 질렌할이 배역을 바꿔 레저가 잭 트위스트가 되고, 질렌할이 에니스 델마가 됐다면 어땠을까. 질렌할이 현재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 사랑을 향해 직진하지 못하는 에니스가 되고, 레저가 사랑을 인생 제1열에 두고 풍부한 감성으로 더욱 깊게 상처받고 괴로워하는 잭을 연기했다면. 고개가 저어진다. 에니스는 너무나 이기적으로 보이고, 잭은 너무 처참해 보였을 것이다.
이안 감독의 캐스팅이 기막히다. 두 인물 모두를 우리가 이해하고 사랑하도록, 그래서 두 남자의 사랑이 두 사람의 사랑으로 보이도록 너무나 적절하고도 절묘하게 배역을 맡겼다.
사실, 에니스라는 인물은 자칫 현실적 속물로 보이기 십상이다. 1년에 몇 번, 두 사람이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진 브로크백 산에서 남의 눈을 피해 밀회를 즐기는 것으로 우리의 사랑을 제한하자, 힘들어도 버텨 보자고 한다. 우리에게는 각자 아내와 자식이 있다는 공통점을 상기시키고, 나는 먹고살기도 급급함을 강조하는 사람이다.
반면 잭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순수하고, 그 소중한 감정에 대해 책임지려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 속에서 보여주듯이 에니스의 선택을 따라 20년을 산 두 사람은 결코 행복하지 못하다. 그 인생길을 미리 내다봤던 듯 잭은 둘이 함께 살기를 원하고, 그런 가운데 각자 책임져야 할 몫을 감당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사랑에도 강자와 약자가 있어서,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여서 에니스의 결정을 받아들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칫, 에니스가 못된 인물로 비출 수 있는데 영화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이안 감독의 연출 의도, 그것을 제대로 표현해 준 배우들이 있어서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잭과 에니스는 각자의 방식으로 아프다. 사랑의 행로에 브레이크를 건 에니스도 이해되고, 엑셀레이터를 밟고 싶은 열망을 지녔음에도 사랑하는 이를 위해 브레이크를 밟는 잭도 이해된다.
만나지 않는 것만은 할 수가 없어서 가끔 만나는 두 사람. 가정을 지키려던 에니스는 되레 이혼하고 그러함에도 잭에게 달려가지는 못하고, 가정은 깨지 않고 있지만 방황하는 잭은 한눈을 판다. 아내와도 선을 긋고 잭 외에는 사랑하지 않은 에니스가 선이고, 자신에게 시간조차 충분히 내주지 않는 에니스로 인한 갈증에 반발 행동을 한 잭은 악일 수 없다. 둘 다 이루지 못한 사랑에 아플 뿐이다.
잭이 떠난 후, 에니스는 사랑의 약자로 보인다. 잭이 남긴 피 묻은 옷, 첫 번째 이별 앞에 자신이 휘두른 주먹에 코피가 터진 잭이 입고 있던 옷. 잭은 그 옷을 세탁하지 않았고, 에니스는 그것을 소중히 보관한다. 아니, 에니스는 이제 사랑 앞에 두려울 게 없는 사람이 되었다. 옷을 매만지며 다짐한다. “I swear…”, 들리지 않은 에니스의 약속은 잭을 향한 것일 테다. 이제야 온전히 잭에게만 집중한다, 사랑을 인생의 중심에 놓는다.
과거 제이크 질렌할은 인터뷰에서, 잭 트위스트는 배우 히스 레저에게 빚진 캐릭터라고 말한 바 있다. 히스 레저가 훨씬 진지했고 철이 없던 자신은 그의 액션에 리액션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액션과 리액션을 주고받는 게 바로 연기라는 배우 한석규의 지론에 비춰 보면, 제이크 질렌할은 제대로 연기했고 겸손하게 말했다.
질렌할은 지난해 인터뷰에서도 자신을 ‘담금질’하며 작품에 자신을 던졌던 배우, 히스 레저를 언급한 바 있다. 패션 매거진 ‘어나더 맨’에서다. 이 인터뷰에서 질렌할은 지난 2007년 아카데미 시상식 주최 측으로부터 개막 무대에 서달라는 제안을 받았고, 영화 내용(동성애)을 주제로 한 농담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히스 레저의 반대로 무산됐다고 전했다.
“아카데미 시상식 측은 오프닝에서 우리가 농담하기를 원했던 걸로 기억이 난다. 하지만 히스 레저는 거절했다. 나는 그 당시에는 ‘뭐, 좋아’라고 생각했다. 항상 ‘뭐든 다 재밌지’라고 말했던 때다. 그러나 히스 레저는 ‘그건 내겐 장난이 아니야. 나는 그것에 대해 어떤 농담도 하고 싶지 않아’라고 말했다. 나는 히스 레저의 그런 것들을 사랑했다. 그는 결코 ‘브로크백 마운틴’에 대해 조크를 하지 않았다. 누군가 그것에 대해 말하려고 하면 그는 ‘이 영화는 사랑에 대한 거야’라고 했을 것이다.”
맞다, 사랑에 관한 영화다. 그것도 1960년대, 들키면 죽임을 당할 수 있는 두려운 사랑이 이미 찾아와 버린 두 사람이 지독히 사랑한 이야기다. 처음에 말했듯, 사랑은 원형을 반복하고 그 원형은 이네스와 잭에게도 고스란히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