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만 반짝 괜찮은 용두사미보다는 점점 나아지는 쪽이 낫다. 1, 2회를 보고 멈추지 않고 계속 본 보람이 있다. 드라마 ‘지리산’ 얘기다.
처음엔 컴퓨터 그래픽(CG)이 낯설었다. 아예 본 적 없고 경험한 적 없는 판타지 세계를 CG로 만드는 것에 비해 각자 나름의 이미지를 품고 있는 지리산 혹은 명산을 CG로 구현하는 일은 애초부터 힘든 작업이긴 하다. 현실 세계의 장소인 만큼 비교치가 확실해서 허술함을 숨길 데가 없기 때문이다.
스토리가 초반의 구멍을 메우지도 못했다. 마치 원거리에서 근경으로 좁혀 들어가듯 전개되는 데다 매회 에피소드 형식으로 진행될 것으로 단정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기에 단박에 확 시청자를 잡아당기지 못했다.
그래도 계속 본 데에는 각자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응복 감독 연출인데 하며 포기를 미룬 이도 있을 것이고, 김은희 작가 극본인데 하며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이도 있을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시청자 이탈을 최소화한 건 배우들이었다.
민낯에 가까운 모습으로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등산복을 입고 지리산을 누구보다 잘 아는 서이강 역의 전지현, 무슨 역을 맡겨도 맛있게 연기하는 정구영 역의 오정세, 어디에 갖다 놓아도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놀라운 친화력을 보여주는 박일해 역의 조한철 등 저마다 좋아하는 배우들이 기다림을 가능하게 했다. 영화 ‘마녀’의 고민시, ‘소공녀’의 김국희, ‘가장 보통의 연애’의 주민경, ‘허삼관’의 민무제를 지리산에서 만나니 반갑고, 드라마 ‘킹덤’ ‘하이에나’에 이어 주지훈과 호흡을 맞추는 전석호를 다시 보는 즐거움도 있다.
드라마 댓글을 찾아보면 역시나 배우들에 관한 관심과 호평이 크다. 특히 주지훈에 대한 애정이 뜨겁다. 훤칠한 외모, 뽐내지 않아도 감추기 어려운 매력도 한몫하지만, 영화 ‘신과 함께’ 시리즈를 통해 숙달된 ‘블루 매트’ 연기와 드라마 ‘킹덤’을 통해 다져진 몸 쓰는 연기가 힘을 발휘하고 있다. CG가 덧입혀질 것을 감안하고 움직이는 동선, 오랜 시간 몸에 긴장감을 유지하는 법을 터득했음이 드라마 ‘지리산’에서 확인된다.
배우 주지훈이 연기하는 강현조라는 캐릭터도 드라마를 계속 보게 하는 데 일조했다. 이대로 중환자실에 눕는 것인가 싶은 안타까움을 거두는 설정, 귀신인가 영혼인가 궁금증을 유발하는 비주얼과 정체, 도대체 서이강 선배와 함께 설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변고가 생긴 것인가의 진실이 회차별로 달라지는 이야기와 별도로 ‘연속성’을 부여했다. 지리산에서 사람들을 구하는 레인저들의 활약을 그린 휴먼드라마일 줄 알았는데 미스터리 추격 스릴러인가 싶게 복합장르로 만드는 역할도 강현조가 하고 있다.
주지훈은 ‘지리산’을 통해 성장을 멈추지 않았음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다. 영화 ‘신과 함께’ 시리즈에서는 강림(하정우 분)의 오른팔 해원맥으로 분해, 덕춘(김향기 분)을 보호하고 성주신(마동석 분)과 티격태격했다. 우직함과 동시에 깨방정 매력을 발산했다. 드라마 ‘킹덤’에서는 세자 이창이 되어 조선을 좀 먹는 영의정 조학주(류승룡 분) 무리에 맞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렀다. 고귀함과 외로움을 동시에 피력했다. 두 작품에서의 공통점은 비주얼 면에서 돋보였다는 것, 악귀나 좀비와 싸울 때마저 멋스러움이 유지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리산’에서는 서이강의 후배로 나오지만 ‘신과 함께’에서처럼 2인자로 보이는 게 아니라 ‘실과 바늘’ 세트로 보이고, 사건 해결을 주도한다. ‘킹덤’에서처럼 나라와 백성을 지키겠다는 대의명분은 아니건만 지리산과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간절함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앞선 두 작품에서와 같이 멋진 복장을 차려입지 않는데도, 옷이며 헤어스타일에 편안함이 보이고 산악용 판초 차림에 시커먼 얼굴로 등장해도 멋있게 보인다. 그 결과, 산을 떠도는 강현조의 혼령은 황량해 보이지 않고 마치 지리산을 지키는 정령, 지리산을 향한 사랑 그 자체처럼 보인다.
캐릭터의 변화와 성장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중요한 건 그러한 배역을 맡길 만하고 시청자가 수긍하고 받아들일 만하니 해원맥이나 이창보다 인간적으로 더 성장한 강현조를 주지훈에게 맡긴 것이다. 배우가 성장하지 못한 채 나이만 먹으면 점점 맡길 배역이 적어진다. 주지훈은 배우로서의 그릇을 확장 시키고 있고, 덕분에 강렬함을 한참 줄인 일상의 인물을 표나지 않는 깊이로 표현하고 있다.
배우의 성장을 통해 캐릭터의 특성이 명확해지는 지점, 한 명의 배우를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재미와 보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