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liver my soul from the sword; my darling from the power of the dog.”
제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저의 소중한 사람을 ‘개의 세력’으로부터 구하소서.
영화 ‘파워 오브 도그’(감독 제인 캠피온, 배급 넷플릭스)의 제목은 구약성경 시편 22장 20절에서 따왔다. 영화 속에도 등장한다. 피터(코디 스밋 맥피 분)가 필(베네딕크 컴버베치 분)의 장례식이 끝난 뒤 성경을 펼쳐 읽는 장면에서 구절까지 생생히 나온다. 마치 필이 ‘파워 오브 도그’, 힘 있는 개였던 것처럼 그리고 이제 필이 죽어 거칠고 폭력적인 개의 세력에서 모두가(적어도 로즈가) 벗어나 농장에 평화가 깃드는 듯한 기운 속에서 영화가 끝난다.
피터는 거대한 목장의 주인 조지(제시 플레먼스 분)의 아내가 된 로즈(커스틴 던스트 분)가 데리고 온 아들이다. 필은 조지의 형으로, 로즈를 ‘꽃뱀’ 취급하며 심리적으로 압박하고 망신 주기를 일삼는다. 로즈는 현실 도피 책으로 술에 의존하고 날이 갈수록 피폐해 간다. 피터는 엄마의 고통을 더 이상 지켜볼 수만 없다. 외과 의사를 꿈꾸는 피터는 여자를 방불케 하는 가녀린 미모로 야성미 넘치는 필에게 ‘게이’ 소리를 듣고 놀림을 받지만 내면은 냉정하고 독하다. 필은 로즈를 더욱 괴롭게 하려는 목적으로 피터를 이용하려 들지만 ‘자가당착’, 자신이 놓은 덫에 자신이 걸려든다.
사실 영화 ‘파워 오브 도그’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 관객을 흡족하게 만드는 지점은 인물 간의 관계를 보여 주는 제인 캠피온 감독의 방식이다. 필을 내세워 공기를 얼려 간다. 로즈만 불안에 떠는 게 아니라 보는 우리의 숨도 막힌다. 서부극인 것처럼 경쾌한 서부음악으로 시작하고 카우보이 복장의 베네딕트 컴버베치가 등장하지만, 위장 혹은 가장이다. 심리 스릴러이기도 하고, 치밀한 복수극이기도 하고,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 이상의 반전 극이기도 하다.
제인 캠피온 감독은 또 카메라 앵글로 인물들의 관계, 그들의 심리를 담아낸다. 일테면 집안 곳곳에 술을 숨겨 놓은 로즈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마당 한 귀퉁이 짐 더미에서 술을 꺼낼 때, 카메라는 그것을 내려다보는 필의 시선으로 목격한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몰래 술을 마시는 로즈의 모습을 담은 화면의 한 귀퉁이는 다른 사물에 의해 가려져 있다.
우리는 필이 되어 로즈를 내려다보기도 하고, 제3의 누군가가 되어 건물 한 귀퉁이에서 로즈를 엿보기도 한다. 필을 올려다보는 느낌이 든다. 로즈를 불편하게 하는 필의 마초적 권위의식 아래 나 역시 놓인 느낌도 들고, 불안과 걱정 속에 로즈를 지켜보는 느낌도 든다. 제인 캠피온의 카메라 앵글은 우리를 영화 곳곳에 들여놓고, 덕분에 인물들의 감정이 생생하게 우리에게 전달된다.
우리에게는 영화 ‘피아노’, ‘내 책상 위의 천사’. ‘여인의 초상’, ‘홀리 스모크’ 또는 드라마 ‘8’로 잘 알려진 제인 캠피온 감독은 ‘브라이트 스타’ 이후 12년 만에 내놓은 연출작으로 세계 영화제의 찬사를 받고 있다. 베니스국제영화제 은사자상(감독상), 골든글로브의 극영화부문 작품상과 감독상을 거머쥐었다.
기사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필은 정말 ‘파워 오브 도그’, 가부장주의와 남성우월주의에 가득 차서 여성과 약자를 괴롭히는 개들의 세력을 지닌, 피터의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엄마를 해하는 ‘힘 있는 개’였을까.
처음엔 분명 필이 많은 이를 불편하게 하는 ‘개’로 보인다. 목장주 역할을 하는 동생을 이름 대신 ‘뚱보’라 부르고 인부들 앞에서 그와 그의 선택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카우보이처럼 입지 않는 조지의 양복조차 못마땅하다. 조지의 여린 감성, 공감 능력을 치부처럼 취급한다. 학자 남편을 잃고 음식점 ‘레드 밀’을 운영하는 로즈도 못마땅하고, 엄마를 도와 서빙을 하는 피터의 생김새와 몸짓도 못마땅해서 공개적으로 창피를 준다. 문화적 정서는커녕 예의와 교양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필, 정말 못됐다.
그런데 점차 보다 보면 자꾸 다른 게 보인다. 씻는 것조차 기피하며 야만에 가까운 남성성을 뽐내는 필의 모습을 보노라면 그 과도한 포장 아래가 궁금해진다. 무엇을 감추기 위해 저토록 과하게 자신을 드러내는가. 자신을 남자로, 제 몫을 하는 목장의 일꾼으로 만들어 줬다는 브롱코 헨리는 필과 어떤 관계였기에 말끝마다 인용되는 것일까. 궁금증은 단서 찾기로 보는 이를 내몬다. 나름의 가설을 세우게 한다. 장면 하나하나를 놓칠 수 없다.
가설 세우기, 단서 찾기, 가설 확인하기 등의 과정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파워 오브 도그’는 지루할 수도 있다. 제인 캠피온 감독이 줄거리와 상관없이 어떤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혹은 후에 보여 주는 장면들이 무의미하게 다가올 것이고 생뚱맞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인물들의 진실 특히 필과 피터의 진실에 다가서려는 마음으로 본다면 퍼즐 조각 같은 화면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단서를 모으고 스스로 세운 가설을 확인하다 보면, 감독이 베네딕트 컴버베치를 캐스팅한 이유에도 생각이 모인다. 초반엔, 새로운 느낌의 악역 연기를 선보이는 것인가 짐작한다, 무슨 역을 맡아도 잘하는구나 싶은 호평과 함께. 중간엔, 호감도 높고 연기력 좋은 배우를 캐스팅하니 그저 ‘개’로 보이지 않는데, 이것이 악인을 옹호하게 하는 잘못된 선택인지 악인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음을 보여 주려는 의도인지 좀 헷갈린다. 점차 퍼즐이 맞춰지면서, 제인 캠피온 감독이 남다른 무게감과 깊이를 지닌 배우를 써야만 했던 이유에 공감하게 된다.
성질 사납고 물면 절대 놓을 것 같지 않은 공격적 사냥개의 외양 아래 쉽게 아물지 못하는 상처와 드러낼 수 없는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눈치챘다 해도, 그것을 수면 위로 올리는 인물이 영화 내에 필요하다. 피터다. 피터에게는 세 가지 강점이 있다. 필이 너무나 싫어하는 외모, 극과 극은 통하는지라 그 반대의 마음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돌아가신 아버지도 걱정했다는 냉혹함,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 없이 차근차근 ‘정리’해 나갈 수 있다. 그리고 외과 의사를 지망하는 손이 피터에게는 있다.
절대 쉽지 않은 역할인데, 그것도 베네딕트 컴버베치를 상대로 칼을 휘둘러야 하는데 스물다섯 살의 배우 코디 스밋 맥피가 깔끔하게 또 매력적으로 해냈다. 잠깐 등장하고 마려나 했는데 비중을 성큼성큼 늘리더니 영화 마지막엔 주인공으로 등극한다. 골든글로브 극영화 부문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영화 ‘렛 미 인’의 외톨이 소년 오웬을 연기할 때부터 범상치는 않았지만, 우리나라 배우 오영수가 드라마 ‘오징어게임’으로 TV 부문 남우조연상을 받은 것에 비춰보면 연기 깜냥을 짐작할 수 있다. 코디 스밋 맥피는 미국 시카고비평가협회, 뉴욕비평가협회에서 제인 캠피온 감독과 배우 베네딕트 컴버베치가 트로피를 받을 때도 함께 수상의 기쁨을 누렸다.
1925년, 보수 성향이 강하다고 알려진 미국 몬테나주, 거친 노동력이 우세한 목장에서 필처럼 남다른 마음의 특성을 가진 이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무엇이었을까. 쉽게 이분법으로 나누기도, 그중 어느 쪽이 옳다고 평하기도 어려운 이유는 단지 반듯한 이미지의 베네딕트 컴버베치가 연기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제인 캠피온 감독이 던지는 간단치 않은 질문과 흔하지 않은 관람법을 접하고 싶다면 예매를 서두르자. 물론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지만, 카메라 앵글이 중요한 영화인 만큼 극장 관람의 묘미가 클 것이다. 다만, CGV 명동역 씨네라이브러리에서만 상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