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에도 대선은 달아오른다
한담이나 하는 토론을 원하는가
안철수‧심상정의 까닭 있는 항의
음력으로 섣달 그믐날, 양력으로는 1월 마지막 날이다. ‘작은 설’이지만 지금은 나이든 사람들의 어렴풋한 기억 속에 흔적으로나 남아 있다. 그 들떴던 마음들은 세월에 쓸려 헤졌고, 온 동네를 쏘다니며 재잘거리던 아이들 모습은 주름살에 가려졌다. 이제 어른들은 한복을 준비하지 않고 아이들은 설빔을 기대하지 않는다. 세시풍속이 거의 사라져버렸다. 설 명절조차도 그저 연휴 기간일 뿐이다.
코로나에도 대선은 달아오른다
삶이 고달파서 더 그렇다. 코로나19의 형세가 갈수록 험악해져서 기가 있는 대로 다 죽었다. 축 처진 가운데서도 꿈틀거리는 곳이 있긴 하다. 정치권이다.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38일 앞으로 다가왔다. 대선 후보와 정당들은 흔한 말로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고 있다. 이렇게 말하기보다는 입에 쥐가 나도록 떠들고 다닌다는 말이 더 맞겠다.
이런 시절에도 후보의 주변에는 청중들이 몰려든다. 선거, 특히 대통령을 뽑는 선거라는 게 구경거리이긴 한 모양이다. 눈물에 속고, 공약에 속고, 큰절에 속으면서도 또 선거 때가 되면 후보의 얼굴을 보려 까치발을 들고, 무슨 공약을 하나 귀를 기울인다. 인간은 마음에 ‘희망’을 품고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후보와 정당을 못 믿더라도 자신의 희망을 배신할 수는 없다. 그래서 속는 줄 알면서도 기대를 거는 것 아니겠는가.
오늘의 관심사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국민의힘 윤석열 두 후보 간의 양자 토론이다. 어제까지 사흘간의 실무협상에서는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민주당은 자료 없는 자유토론을, 국민의힘은 자료 지참 자유토론을 주장하면서 어느 쪽도 물러서지 않은 바람에 성사가 불투명해졌다. 오늘 오후 6시에 개최키로 한 만큼 그 때까지 타결을 기대할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양측의 버티기 양상으로 봐서 당초 계획대로 이뤄지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양자 토론은 당초 민주당 이 후보가 제안했었다. 작년 11월 8일 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에서 이 후보는 윤 후보에게 미래와 국민들의 삶을 놓고 진지하게 논의할 일대일 회동을 갖자고 요청했다. “각자가 가진 철학과 가치 비전 정책 실력 실적을 수시로 대비하고 논쟁할 장으로 주 1회 정책 토론의 장을 가져 보자”는 것이었는데 당시로서는 좀 생뚱맞은 제안이었다.
한담이나 하는 토론을 원하는가
이 후보는 그 전달인 10월 10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그러나 ‘대장동 의혹’으로 인해 컨벤션 효과는커녕 오히려 여론의 외면을 받는 상황에 처했다. 윤 후보는 11월 5일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홍준표 의원과의 접전 끝에 후보로 확정됐다. 이 후보와는 달리 컨벤션 효과에 힘입어 여론조사 지지율에서 크게 앞서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 후보가 1대1 회동을 제안한 데는 나름의 계산이 있었을 법하다.
무엇보다 ‘대장동 의혹’의 늪에서 빠져나가는 묘수라고 여겼을 것이다. ‘철학 가치 비전…’ 같은 것을 주제로 토론을 한다고 하면 대장동 의혹은 물론 ‘형수욕설’ 등 다른 얼룩들도 자연스레 세탁될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그는 말재간을 과시하는 타입이다. 윤 후보와 1대1 토론을 할 경우 두 사람의 우열이 뚜렷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계산했을 게 뻔하다.
그간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어쨌든 성사 전 단계에까지 이르긴 했다. TV중계 혹은 녹화중계 토론은 법원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 이런 방식이 아닌 토론이라면 법원이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든 제지할 까닭도 방법도 없다. 거기까지는 합의가 이뤄졌다. 그런데 토론에 자료를 이용하느냐 못하느냐로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문제가 될 수 없는 문제에 걸린 것이다.
의제 제한 없이 자유토론을 하자면 더더욱 자료가 필요하다. 후보 두 사람이 만나 한담(閑談)이나 하자는 것은 아닐 터이다. 경쟁자들끼리 서로 덕담을 하자고 갖는 자리일 리도 없다. 이왕 만나서 토론을 하기로 했으면 제대로 해야 한다. 따질 건 분명히 따지고 해명도 똑 부러지게 하는 토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후보 측이 왜 자료 지참을 거부하는 지 그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윤 후보만 자료를 갖고 들어가겠다는 게 아니지 않은가. 민주당이 그간 얼마나 기세 좋게 윤 후보를 공격해댔는지 국민은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아마 자료는 충분히 확보해뒀을 것이다. 그걸 가지고 들어가 따지면 된다. 왜 자료를 싫어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안철수·심상정의 까닭 있는 항의
자료 없이는 효과적인 문제제기가 어렵다. 그런 만큼 이 후보를 둘러싼 갖가지 의혹들에 대한 윤 후보의 심도 있고 구체적인 질문이나 추궁을 피하겠다는 의도일 수가 있다. 답변 혹은 해명 과정에서 상대방의 말실수를 유도해 두고두고 공격거리로 이용하겠다는 계산일지도 모른다. 토론을 말재간 공방전으로 이끌면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는 이 후보의 기술이 빛을 발할 수가 있다는 계산일 것도 같다. “설마 그렇게까지 야…”하는 생각이 들지만 ‘자료 없는 토론’을 고집하는 이유가 달리 있어보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말인데, 토론을 하려면 토론답게 할 일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자료를 갖고 들어가지 못한다고 억지를 부리려면 차라리 토론을 않겠다고 하라는 것이다. 대장동 특검을 하겠다고 큰소리치면서 결국 무산시켜버린 재주를 또 발휘하려 해서는 안 된다. 무엇에 대해서든 다 토론하겠다고 했으면서 ‘자료 지참’을 꼬투리 삼는 것을 보면 그 의도가 짐작돼 하는 말이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 정의당 심상정 후보의 철야농성도 이재명 대 윤석열 맞짱토론의 성사를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등장했다. 당사자들끼리 합의한 것이고 TV중계나 녹화중계도 못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배제되는 측으로서는 불쾌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까지 항의하는데 기어이 토론을 하겠다고 고집하기가 쉽지는 않을 듯하다. 양측도 썩 내켜하지는 않는 분위기다. 어쩌면 이를 핑계로 토론을 접을 지도 모르겠다.
이래저래 선거전이 갈지자(갈之字)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그러잖아도 국민들은 넘치도록 우울하다. 토론을 하기로 한다면 법정 TV토론 대상이 되는 후보 모두가 참여해서 하는 게 합리적이다. 그게 싫다면 법정 토론 외에는 안 하면 된다. 괜히 이런 일로 논란을 빚어 국민들의 짜증을 돋우지는 말기를 바란다. 그 정도 예의는 지켜줘야 하지 않겠는가.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